[15화] 새해의 어느 날
새해라고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애벌레에서 번데기 되듯 탈피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해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새해가 주는 그 특별한 힘이 그날의 날을 반탈피 인간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과 같은 똑같은 하루였다. 작심삼일의 하루하루는 이미 다 지나가 버렸다. 2025년의 어느 날처럼 2026년의 새로운 날들을 흘려보내던 아침인데, 이상하리만큼 시리얼 먹은 호랑이 같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평소에 5km 정도 슬슬 달리던 나는 그날 8km 정도 달려내면서 흠뻑 묵은 땀도 흘려보냈었다. 호랑이 기운은 다 흘려보내서 기력도 없는데, 정신만은 오히려 말똥말똥하여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영화관이 생각났다.
영화관을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더라...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마지막 영화는 '겨울왕국 2'이다. 영화를 잘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는데, 본디 성격이 외골수에 고집도 강했던 내 성격상, 다른 사람이 이끄는 흐름을 쫓아가는 게 영 힘들다. 훌륭한 감독들의 시선이 스크린에 흘러나가는데 자꾸 내 눈은 스크린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리고 흐름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영상도 스킵하거나 못 봤던 부분을 자꾸 되감아 보거나 하게 되고 그마저 번거로우니 나는 텍스트가 한가득한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책은 작가의 흐름을 내 속도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하튼 새해의 말똥 한 기운으로 영화를 보기로 결정하고 버스에 올라타서 '만약에 우리'라는 영화를 예매했다.
직장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여의도에 운동복을 입고 영화관을 온 내 모습이 정말 생경했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서 30분의 짧은 찰나에 햄버거라도 하나 먹고 영화관에 가려고 했는데, 점심시간 북새통의 패스트푸드점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점심시간이 약간 끝나가는 찰나였으므로, 한상차림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은 다소 한가해 보이고, 패스트푸드점은 주문이 족히 100개는 밀려서 먹는 사람 반 기다리는 사람 반으로 매장이 꽉 차있었다. 나는 사실 지난 추석에 비행기에서의 곤란했던 기억으로 아직 사람이 많고 붐비는 곳이 힘들다. 패스트푸드점은 뭉크의 절규처럼 공기가 뒤틀리는 듯했다. 사람들의 기다리는 소리, 기계 소음,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때로는 약간의 짜증 섞인 말투들.. 그야말로 불속에 뛰어든 것처럼 어지럽고 온몸이 불타는 듯하여 매장을 한 바퀴 돌고 바로 포기했다.
" 나 영화 괜찮을까..."
패스트푸드문을 닫고 혼잣말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관은 어쨌든 나에게는 많이 어둡고 감당하기 힘든 공간이다.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무언가 한 발씩 내디뎌 보고 싶었고, 어둠에 갇혀있는 나를 스스로 시험하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이런저런 용기와 두려움사이에 나는 익숙지 않은 팝콘과 콜라를 양팔에 한가득 끼고 자연스럽게 영화관에 입성했다. 요즘은 QR로 입장티켓을 체크인하듯 찍는데, 양팔에 먹을거리가 가득한 나를 보고 직원은 자연스럽게 내 표를 태깅하고 입장을 안내해 주었다.
오랜만에 온 영화관의 스크린은 딱 내 예상만큼 컸고, 딱 내 예상보다 더 컴컴한 실내여서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고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증권가에 자리 잡은 평일 낮의 영화관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다행히 다른 사람을 마주할 일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니 덕분에 나는 울렁거리고 어지러울 때마다 자리를 나서서 영화관 밖으로 나만의 대피를 갔었다. 첫 나만의 대피 때는 비상시 먹는 상비약을 먹고 다시 내 자리로 향했다. 그렇게 영화 시작도 전에 족히 두 번은 나가게 되면서.. 속으로 5번 이상 자리를 떠야 하면 영화 보기를 그만두자고 다짐했었다. 맨 뒷줄의 구석자리라 누가 돌아다니든 아무도 모를 테지만.. 그 이상의 대피는 영화를 보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영화는 나와 비슷한 학번의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서사로, 어느덧 40살이 된 내가 대학시절을 회상하며 나의 모습도 혹은 그 시절 친했던 친구들도 모두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아름다운 주인공들의 그 시절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이미 극 중반부터 나는 눈물을 몇 번이나 훔쳤는지 모르겠다. 줄거리를 찾아보거나 스포일러를 당한 것도 아닌데 나는 주인공들의 미래가 그려지는 듯, 혹은 그 시절의 연약하고 자유로운 내 모습이 자꾸 보이는듯하여 여러 표현할 수 없는 감상들로 자꾸 눈물을 흘려댔다. 그 사이에 나는 몇 번이나 대피를 했는지 헤아릴 수 없게 되어 다행히 영화를 끝가지 감상할 수 있었다.
" 그 친구들, 그 사람도 이 영화를 보고 내 생각을 해줄까.."
보통은 영화에서 내가 감정을 느끼는 포인트들은 누구나 그렇듯, 스토리가 후반으로 몰이 쳐 갈등이 해결되거나 주인공이 시련에 빠지거나 하는 부분인데, 이 영화에서는 왜인지 아름다운 장면들에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려대었다. 맨 뒤줄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행동도 실루엣으로 보였는데, 다들 울지 않는 포인트에서 나는 혼자 울면서 도대체 감정이 어디서부터 고장 난 건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마치 오래된 핸드폰에서 그 시절 사진과 영상을 본 것처럼 자꾸 주인공들의 모습에 내 모습이 투영되어 즐겁기도 아련하기도 하여 몇 번이나 생각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내 눈은 스크린을 빠져나가지 않고 있었고, 어둡고 답답한 공간이 그 시절 우리 집에 온 듯 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몰두해서 보고 골똘히 나의 예전모습을 돌아보는 40의 나라는 사람이 조금 짠하게 느껴지는 찰나에 영화관의 불은 켜지고,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40대의 트라우마우울의 인간을 다시 맞딱들이게 됐다. 그 시절의 나는 40대의 내가 이럴 줄 몰랐는데... 좀 더 놀고 좀 더 젊음을 즐기라고 과거의 나에게 한마디 얹어주었다.
새해부터 호랑이 기운을 낸 덕에 영화도 집중해서 보았지만, 나만의 대피를 몇 번이나 한 탓에 당분간 영화관은 시도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고 끝까지 해보려는 나 스스로에게 토닥거림을 주었다. 영화가 나에게 주는 울림과 동시에 이 영화는 나에게 과거의 젊음이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아련함과 용기로 되새겨질 듯했다. 아직은 어둡고 갇힌 느낌을 주는 곳이 나에게 힘든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가 새해라는 타이틀로 나를 밀어붙여댄 탓에, 나는 그날 저녁에 좀 앓아대긴 했다. 용기로 시작하여 어둠의 멀미인지 젊음의 후회인지 눈물의 과로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키는 그런 하루였다. 고작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어릴 때 왜 더 젊음을 만끽하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와 나에 대한 미안함이 서서히 파도처럼 밀려오고 나는 앓아대면서 연신 울어대는 통에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p.s 많이 늦어졌지만, 트라우마 극복하기 위한 글쓰기는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