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벤더를 통해 제품을 판매하게 되는데, 판매 수량은 벤더의 발주량에 따라, 판매 가격은 벤더의 최종 판매가를 고려한 벤더의 '공급가'까지 컨트롤이 가능한 상태였다. 전통적인 제조업의 유통구조였던 셈이다. 이는 무수한 장점이 있고, 우리의 훌륭한 벤더들은 긴 협업기간 동안 서로의 이익을 잘 맞춰주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시스템의 안정성은 이 커머스 발전이라는 외부 충격에 묵사발이 났다. 기존에는 거래처들의 '지리적인' 물리적 한계 때문에 벤더간 경계선이 비교적 잘 지켜져왔다. 대형매장들은 그들의 '매장 안'이라는 경계가 있었고, 대리점들은 운송 및 영업 비용이 이윤과 맞아떨어지는 지점까지만 확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그러한 경계들이 의미가 없어졌다.
춘추전국 시대였다. 가격정보는 온라인에서 엔터 한번으로 찾을 수 있었고, 오프라인 소규모 매장들은 메리트를 잃어갔다. 도매거래를 하던 대리점들도 온라인 소매판매에 뛰어들었는데, 대리점'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런 과정에서 브랜드가 약한 상품들은 온라인 몰들의 미끼 상품으로 전락했고, 최종소비자가의 붕괴는 제조업체의 '공급가' 인하 압박으로 다가오면서 동시에 소비자들에게 저가 브랜드로 포지셔닝되었다.
제조업체에서 직접 직영몰을 운영하면 되지 않나? 이는 대리점 영업을 완전히 포기하는 셈이었다. 그들이 매입을 끊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Buying Power가 있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행위는 금기시되는 것이 제조업체들의 특성이다. 특히 대체제가 많을수록 이런 경향성은 강하다.
시대의 흐름에 불거진 대리점 및 벤더 유통을 하면서 발생되는 문제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수요예측이 어렵다.
최종판매처와 공급처 사이에는 재고 버퍼가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대리점이 '매입'하는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가격 변동이 있거나, 제조사의 영업 목표 달성을 위해 소위 '물량 땡기기(혹은 밀어넣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시장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능동적 영업 활동이 어렵다.
A라는 제품의 재고가 많이 늘었을 때, 가격 인하를 통한 탄력적인 수요 조작이 어렵다.
회사에서 밀고자하는 전략적 아이템 확장이 어렵다. 특히 프리미엄 제품을 출시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점이 많다. 유통벤더와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마케팅을 진행하기에 구조적으로 너무 어렵다.
먼저 가격 구조가 안나온다. 공급가 수식에는 공통판관비나 적정 마진이 들어있지, 마케팅비용이 따로 반영되지 않는다. SKU별로 가격 구조를 따로 가져가면 되지 않냐고? SKU가 50개만 넘어가도 매일매일 내려지는 가격 의사결정에 '정확한' 현실 반영은 어려워진다.
'상대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나온다. A카테고리를 중점으로 취급하는 대리점은 B 카테고리 마케팅 시 상대적인 손해를 보게 된다. 랜딩을 어디로 시킬 것인지도 문제가 된다. 검색광고, 배너광고를 한다고 했을때 랜딩을 어디로 시켜야하는가? A대리점 몰로 하면 B대리점 몰은 당연히 불만이다. 자사몰로 몬다고 했을때? 이탈률이 높아지고 이 또한 반발을 사게 된다.
이는 비단 우리 회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아래 글은 "D2C 레볼루션"이라는 책에 적힌, 질레트의 상황이다. 달러쉐이브클럽이 시장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고민이었다.
전직 질레트 임원이었던 ...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월마트에 불려 가서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소비자에게 직접 면도날을 팔겠다고요? 우리 매장을 통해 판매하지 않으면 당신 회사 면도기를 우리 매장에서 빼겠습니다' 라는 엄포를 듣는 상황을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 D2C 레볼루션, p.60~61
투자자들은 이렇게 묻더군요. '만약 질레트가 같은 사업 방식을 채택해 온라인 구독을 시작하고 제품 가격을 낮추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질레트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고수해 온 사업 방식을 죽어도 버리지 못할 테니까요. 다음 분기에 수익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도 없어요. 게다가 온라인으로 무대를 옮겨 여태껏 소매업체와 쌓아 올린 관계를 망치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겁니다."
- D2C 레볼루션, p.44
이렇듯, 거대 글로벌 기업인 질레트마저 소매업체와 쌓아온 관계를 무너뜨리지 못해 쉽사리 시류를 타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소매나 벤더 영업을 아예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뿐더러, 다년간 쌓아온 관계의 무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제조업체와 소비자와의 물리적인 거리가 사라지는 추세속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면, 그 끝은 좋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