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를 받았다
프로포즈각이었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 어김 없이 야근을 했다. 회사 로비를 나서고 있는 내게 (당시) 애인이 "라쿠치나 본점을 예약해뒀으니 여기로 와요." 하며 카카오톡으로 지도를 찍어보냈다.
크리스마스 이브, 레스토랑, 예약. 순조로운 양가 방문과 다음달로 잡아놓은 상견례까지. 모든 것이 프로포즈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체 해줘야지. 나는 패딩 대신에 코트를 입고 나온 스스로를 칭찬하며,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빈 손가락에 이런저런 반지를 상상으로 합성해봤다. 애인이 어떤 말을 해도 울지 않고 늠름하게 'YES!' 외치리라 다짐도 했다.
설렘은 오래 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라쿠치나 건물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건 통째로 빌릴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다. 오늘 프로포즈 받는 건 아니구나.' 트리 전구로 외벽을 휘감은 건물은 거대했고 내 설레발은 논리의 세계에서 한참 먼 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스스로를 프로포즈에 대한 로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성인 두 사람이 함께 가정을 꾸리는 일인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게 요상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TV에서 프로포즈를 안 했다는 이유로 구박 받는 남편들, 한에 서린 아내들을 보면서 '프로포즈가 뭐 별 거라고' '결혼 전 특별한 세레모니를 원하면 직접 하면 되지' 했었다. 하지만 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알게 됐다. 굉장히 별 거라는 것을.
1월에 상견례를 앞두고 한 달 전까지 프로포즈 생각이 전혀 없어뵈는 그를 보니 어쩐지 분했다. 평생 한 번 뿐인데(이 문장은 결혼 준비 과정에서 무적이다) 이대로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결혼을 하게 되는 건가. 심지어 '내가 만만한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한편 '나도 프로포즈 로망을 버리지 못하는 그저그런 예비신부일 뿐인가' 싶어서 짜증도 났다. 나는 이런 데 쿨할 줄 알았는데. 우씨.
그렇다고 프로포즈해달라!고 말하기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데다가 멋도 없다. 구박하기도 애매한 것이, 나는 프로포즈를 이미 여러번 받았다. 각 잡힌 이벤트가 없었을 뿐. 사귄 지 6개월도 안 돼서 애인은 결혼무새가 됐다.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나)→ "좋아? 결혼할래요?"(애인) / "이대로 집 가기 아쉽다"(나)→"아쉬워? 같이 살까?"(애인) / "귀여워"(나)→"귀여워? 그럼 데려가든가!"(애인)... 이런 패턴이었다.
이런 복잡한 심경으로 라쿠치나 본점을 향해 가는데 애인이 불쑥 나타났다. 내 어깨를 잡더니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거기 아냐. 우리 하얏트 호텔 갈 거야 오늘."
로맨틱한 노래도, 꽃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없었다. 심지어 무릎도 안 꿇었다(나중에 구박해서 꿇음). 테이블에는 조그만 트리 모양 카드와 귀걸이가 놓여 있었다. 입술이 달달 떨렸다. "나와 결혼해줄래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프로포즈 받을 때 우는 거 다 연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내 눈물을 닦아주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애인에게 안겨 야경을 내려다봤다. 나는 이제 매년 크리스마스를 이 남자와 함께 보내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빈틈 없이 행복했다.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에 나는 "왜 나랑 결혼하고 싶은데요? 그 말도 해야지! 무릎 안 꿇었지? 그럼 무효예요. 다이아반지도 없잖아요. 기본이 안됐어!" 하고 장난을 걸었다. 그는 막 웃더니 "당신이 웃는 게 너무 좋고,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고, 그렇게 할 자신도 있다"고 했다. 나는 또 웃었다. 그러다가 내가 "사람들이 나중에 프로포즈 어떻게 받았냐고 하면 어떻게 설명하지? 호텔방에서 받았다고 할 수 없잖아ㅠㅠ"라고 했더니 그는 침착하게 "이건 내수용이고, 대외용으로 한 번 더 해줄게요"라고 했다. 이날 우리는 약혼한 사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