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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13. 2024

야구의 나라

짧은 리뷰

왜 야구인가?


인기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시청률이 가장 높게 나오는 스포츠 경기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다. 하지만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는 자주 있는 게 아니고, 한국 프로축구 리그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스포츠는 아마도 프로야구일 것이다.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처럼 주목도가 높진 않지만 야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도 꽤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무엇보다도 프로야구는 프로축구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모든 프로리그에 비교하더라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스포츠 리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야구가 축구보다 인기가 높을까? 야구는 장비도 많이 필요하고 운동장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룰도 축구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실제로 야구를 플레이하려면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지(투수가 스트라이크는 던질 줄 알아야지) 게임이 재미있다. 공 하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플레이할 수 있는 축구에 비하자면 야구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는데 제약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리그를 탄생시켰을까?


<야구의 나라>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책이다.



야구를 사랑한 엘리트들


저자는, 학연으로 얽힌 한국사회 엘리트들-정치인, 기업인, 언론인들의 파워가 야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식민지 엘리트들의 역할


이 이야기의 기원은 일제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일본의 명문학교에 미국인 영어 교사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미국 문화와 함께 야구가 일본에 전파되었다. 다이쇼 시대(1912~1926)에 이르러 야구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 또한 야구에 진심이었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조선에서 야구팀을 만들게 되었다.(22쪽) 한편 조선총독부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영국이 축구, 크리켓, 럭비 등 극대 스포츠를 이용해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의 엘리트들이 영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도록 자극했던 것처럼 일본 또한 조선의 엘리트들이 자연스럽게 일본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에 익숙해진다면 식민지 통치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의 근대화를 목격한 엘리트들은, 유학시절 시절 접한 야구에 친숙함과 동시에 근대 일본의 힘을 느꼈다. 거대한 경기장과 정돈된 그라운드, 복잡하고 다양한 야구 장비와 멀끔히 차려입은 유니폼은 조선땅에서는 볼 수 없는 세련미와 스펙터클을 가졌으니까. 예컨대 1937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의 금메달을 보도하며 일장기를 말소했던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도 1931년 일본 고교야구 대회인 고시엔을 취재하면서 고시엔 야구장의 규모에 압도되었다고 한다.(31쪽)


이처럼 일본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야구를 전파하는 동안 공립고보는 학생야구의 요람이었다. 당시 조선땅에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이 매우 적었고, 공립고보에 다닌 조선인은 인구의 1%도 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엄청난 엘리트였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축구에 비해 야구의 인기가 시들했지만, 적어도 조선의 엘리트들에게는 모교의 교기였던 야구가 친숙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일제강점기 시기의 명문학교들은 해방 이후에도 소위 명문학교로 군림하며 한국사회의 엘리트들을 배출한다.


해방정국의 엘리트들


일제 강점기에 축구가 민족스포츠의 대접을 받은 반면 야구는 일본의 스포츠였고 부유층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총독부와 관계가 깊었고, 그런 이유로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야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한다. 야구 엘리트들에게는 친일이라는 딱지를 떼는 것이 중요했고 야구를 할만한 물적인 토대가 부족하다 보니 야구공과 장비를 지원해 줄 물주가 필요했다. 쌀 한 되가 185원일 때 야구공 한 개가 250원이었으니 말이다.(97쪽)


새로운 파트너는 바로 미군정이었다. 야구는 미국의 국기(National Pastime)였고 주한미군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그리고 한국인들의 미군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서 야구는 미군정에도 무척 좋은 도구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방 이후 한국에서 "야큐(야구의 일본식 발음)는 베이스볼"이 되었고 미군정 시기에 청룡기 대회가 시작되었다.


실업야구의 은행원 엘리트


한국전쟁이 휩쓸고 간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는 실업야구, 특히 은행팀들의 전성기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은행원은 화이트칼라의 상징이었고 매우 인기가 높은 직업이었다고 한다. 1962년 중소기업은행을 시작으로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등이 야구팀을 만들었고 덕분에 실업팀의 숫자는 13개가 되어 1964년 최초로 시즌 제도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에게는 은행야구팀에 들어가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은행 야구팀에 들어간 1년 차 선수들의 월급은 5급 공무원과 비슷한 수준이었다.(143쪽)


은행이 야구팀을 만든 것은 직장 내 스포츠 팀을 추친하라는 의미의 국민체육진흥법이 1962년 공포된 이후다. 하고많은 스포츠들 중에 은행들이 야구팀을 창단한 까닭은 당시 화이트칼라의 상징이었던 은행에서 일하는 은행원 가운데 야구를 교기로 하는 상업고 출신 사원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야구부가 있던 명문 상업고의 동문들이 각 은행 고위직에 오르는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친숙한 스포츠인 야구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선린상업고등학교 출신의 김진흥 한일은행장이 대표적이다.


고교야구 시대의 정재계 엘리트들


1982년 프로야구 리그가 생기기 전, 1970년대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은 당연히 고교 야구였다. 그리고 그 시절 서울대 입학생 숫자로 경쟁을 하던 소위 명문고들이 경쟁하는 또 다른 전장이 고교야구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역사를 이어오는 경북고, 경남고, 광주일고 같은 학교들 뿐만 아니라 명문고를 자처하는 학교들은 야구부를 새롭게 만들어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입시에서는 최고였지만 야구부가 없었던 서울고와 경기고의 경우 1974년 고교평준화 이후 더 이상 입시만으로 명문고 타이틀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야구부를 재건한 것이 대표적이다.(162쪽) 학교가 야구부를 운영할 예산이 부족한 경우, 명문고 출신 사회 엘리트들이 주축이 된 동문회에서 후원금을 모아 야구부를 창설하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고교야구의 붐을 일으킨 데는 이처럼 학연으로 묶인 엘리트주의가 바탕이 되어 있었고 이에 더해 좋게 말하면 애향심, 다른 말로 하면 지역주의가 작동했다. 지역 명문고의 야구팀들은 자연스럽게 그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고, 이 고등학교 팀이 전국대회에서 거두는 성적이 지역 사회의 커다란 관심사가 된 것이다. 마치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한국 국가대표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국민들이 환호하는 것처럼, 지역 고등학교 야구팀의 선전은 그 지역 주민들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교야구팀들은 단순하게 학생 야구 선수로서 경기에 임하는 것을 넘어서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경기에 나섰고,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고교야구팀들은 거액을 들여 스타 감독을 모셔왔다. 충암고는 예능 재일조선인 출신 김성근 감독(지금은 최강야구 감독)을 모셔온 것이 대표적이다.



프로야구 시작과 엘리트들의 역할


한국 프로야구의 시작은 1982년이지만 그 태동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업야구가 고교야구에 밀려 인기를 잃어가던 1976년 한국성인야구 재건 및 프로야구 준비위원회가 야구 재건 5개년 계획을 내놓았지만(232쪽), 정권 차원에서 절약과 절제를 국민들에게 강요했던 시기인지라(237쪽) 프로야구 창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모두가 알다시피 전두환 정권 때 프로야구가 만들어지게 된다.


프로축구보다 프로야구가 먼저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앞서 말한 1970년대에 아주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이미 나와 있어서기도 했지만, 당시 청와대의 고위직들이 야구 명문고 출신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사실 전두환은 육사 시절 골키퍼로 활약했고 축구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프로스포츠 창설의 실무를 맡은 고위 권력층들은 야구계와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보아온 야구에 더 익숙했던 것이다. 야구 명문 경남고 출신으로 프로야구 창설에 가장 앞장선 민정수석비서관 이학봉이 대표적이다.(262쪽) 게다가 이들 중 많은 수가 미국 유학을 했는데, 유학 시절 접한 미국의 야구 문화도 야구를 익숙하게 하는 게 크게 작용했다.


운영비가 많이 드는 프로야구팀을 만들 수 있는 기업이 많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재벌들이 프로야구단을 만들게 되었다. 롯데의 경우 일본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면서 야구단 운영이 기업 홍보와 매출 상승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한국 프로야구팀을 만들었다면 삼미와 두산은 소비재를 팔지 않으니 굳이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이 이익이 될 것이 없었지만 기업의 총수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미국사회에서 야구단의 수장이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 것을 직접 경험한 것이 프로야구팀 창설로 이어지게 했다. 이처럼 학연을 제외하더라도 엘리트주의는 한국 프로야구의 탄생에 끈끈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야구 몰라요(feat 정치)


엘리트와 학연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낸 한국 야구의 역사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스포츠와 정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일본과 조선총독부, 미군정, 박정희와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 모두 야구를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지금도 대통령이 한국시리즈 시구를 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거나 선거 때 유력 정치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야구팀 팬덤에 지지를 호소하는 장면을 보면 야구를 정치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여전하다. 그런데 과거에는 훨씬 더 노골적이었던 거 같다. 물론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들에 대해 내선융화를 이루기 위해, 그리고 식민지의 엘리트들이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하기 위해 야구를 활용했고 고시엔 대회에 조선의 학교들도 출전하게 했지만,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의 바람과는 다르게 야구로 일본에 저항했다.(71쪽) 고시엔 출전권을 두고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 야구부가 격돌하면 압도적인 응원을 조선인 야구부에 보내곤 했다. 물론 조선의 야구 엘리트들은 먹고살기 위해 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팀에서 뛰어야 했지만 적어도 조선 민중은 야구로 일본에 융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의 경우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 우호적인 조총련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견제하려고 재일조선인 야구 선수들을 초청해 순회 경기를 갖게 했다. "재일 교포들은 우리의 자유권을 빼앗기고 공산당의 노예가 되어서는 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지난 수치를 다 씻어서 이제부터는 모든 것에 이겨 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는 말이 동아일보 기사로 보도되었다.(121쪽)


박정희의 경우 1964년 한일국교 정상화의 굴욕적인 내용을 가리는 데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 승리를 적극 활용했다. 한일전 승리로 극일의 이미지를 홍보하면서 한일 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자신에 대한 친일 이미지를 지워내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정치적 야구 활용은 1970년대에 더 치밀해진다. 1972년 유신체제 이후 더 심해진 지역감정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김종필 국무총리와 박준규 의장이 대구의 3개 팀, 광주의 6개 팀이 참여하는 국무총리기쟁탈 영호남 고교야구 대회를 기획했지만 지역감정 해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77~178쪽) 오히려 지역 고교팀의 대결은 지역의 경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물론 고교야구의 이러한 지역주의는 훗날 프로야구의 성공요인이 된다.


1983년 첫 한일정상회담을 앞둔 독재자 전두환 또한 과거 박정희가 그랬듯이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야구로 해소하려 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 승리가 전두환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을 것이다. 당시 우승을 이룬 선수들에게 병역 특례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야구의 창설 또한 익히 알려진 바 대로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 또한 있었다. 물론 나는 이 기획 또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독재자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만든 프로야구지만, 예를 들면 광주 시민들은 무등경기장에서 전두환에게 탄압받는 김대중을 연호했다.


이처럼 야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더러는 성공했지만 대개는 실패했다. 사람들은 야구를 좋아하지만 권력자들이 야구에 심어놓은 정치적 의도와 야구를 구분할 줄 알았던 것이다.



책임감 있는 팬이 되고 싶다


이 밖에도 사회경제적인 요인들이 한국 야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야구의 나라>에 풍성하게 들어가 있다. 정부의 호남 홀대가 공장이 없는 전라도민들의 대규모 엑소더스로 이어지고, 그 덕분에 전라도팀인 해태 타이거즈가 전국적인 인기팀으로 발돋움했다는 사실 같은 거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그 사회의 지문이 묻어있다. 야구 또한 스포츠지만 그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야구에 대한 책은 정치에 대한 책이고, 경제에 대한 책이고, 문화나 역사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나는 프로야구팬이고 프로야구를 무척 즐겨보지만, 야구가 엘리트들의 학연으로 성장했고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프로야구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어떤 한계 혹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책임감 있는 팬이 되고 싶으니까. 이 책은 야구와 정치, 야구와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앞으로는 야구와 기후위기, 야구와 환경문제에 초점을 맞춘 책도 나오기를 바란다. 야구가 지속가능한 스포츠가 되기 위해서는 기후위기 문제나 환경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보다 경기 수가 많고 선수단의 규모도 크기 때문이다. 당장 미세먼지로, 혹은 갑작스러운 폭우로 경기가 취소되기도 하니 이는 프로야구 구단의 이익과도 직결되는 문제 아닌가. 책임감 있는 팬이 되는 것, 그것이 야구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아주 새롭고 흥미로운 정보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도 무척 재밌는 책이지만, 그 정보를 통해 책임감 있는 팬으로서 야구와 정치 혹은 야구와 권력에 대해 고민해보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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