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소설, 혹은 이야기의 미덕은 읽는 사람의 삶과 포개어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 서적이라면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책이라도 그 책을 읽고 지식이 늘겠지만 그 책에 내 삶이 포개어지기는 쉽지 않다. (물론 아주 예외적으로 자신이 속한 계층, 계급을 면밀하게 분석한 사회과학서적을 본다면 자신이 삶이 책에 포개어질 수도 있겠다) 반면 소설책은 어떤 방식으로든 소설에 나오는 누군가에게 감정이입하게 되거나 등장인물의 모습이 꼭 내 모습 같다거나 하는 걸 경험하기 쉽다.
소설이나 문학에 대해 비평할 깜냥이 안 되는 나로서는 좋은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을 구분한 재간은 없지만 적어도 문학작품에서 좋은 책을 고르는 데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다. 사람들의 삶이 천차만별 제각각 다르니, 같은 이야기를 읽어도 다르게 읽고, 서로 다른 인물에 빠져들거나 공감하기 마련이다. 모든 장르가 그렇겠지만 소설만큼 맥락적인 독서가 중요한 장르도 없지 않나 싶다. 나는 좋은 소설을 고르지 못해도 내가 재밌게 읽은 소설이 무엇인지, 그 소설이 왜 내게 재밌었고 기억과 인상에 남는지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
<딸에 대하여>는 영아가 꼭 읽어보라고 해서 읽게 되었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은 <불과 나의 자서전>을 본 것이 유일했다. 어디선가 추천하는 글을 봤는데, 추천의 내용보다도 소설의 계급성이 눈에 띄었다. 황정은의 많은 작품들처럼, 가난한 동네, 철거지역이 배경이라는 점 때문에 끌렸고, 읽었다. 내용은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고 희미한 감정으로 독서의 흔적이 남은 소설이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겨울철에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온기 같은 감정. 좋은 경험이었지만 요즘 나는 좀 더 신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기 때문에 아마도 영아가 추천하지 않았다면 김혜진 작가의 소설을 지금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심난한 감정이 더 강하게 남는 소설이 있지만 무척 재밌게 읽었다. 내 삶의 맥락에서 이 소설에 포개어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공통점이 있지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강사고, 레즈비언이다. 학교에서 부당한 일에 앞장선다거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거나 하는 측면은 내 삶의 궤적과 비슷하지만 주인공과 주인공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에서 가장 핵심적인 갈등의 축-성소수자 자식과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부모의 갈등 같은 것은 내게는 없으니까. 물론 나이를 먹고도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딸을 바라보는 주인공 엄마의 모습에선 얼핏 울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만(나는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돈 안 빌리고 살지만, 또 울 엄마가 보기에 나 또한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충분히 독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경제적인 것, 금전적인 것만큼 젠더화 된 것이 또 어디 있겠다. 주인공이 가난한 까닭을 오로지 시간강사라는 직업만으로 한정 지을 수 없고, 그녀가 성소수자인 까닭도 깊게 연관되었을 테니까.
아무튼 내가 주인공과 주인공 엄마와의 갈등을 나와 울 엄마 사이로 가져오는 것은 일종의 자기연민처럼 보이기도 하고, 좀 억지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 책은, 특히 소설은 자기 맥락으로 읽어가야 제 맛 아니겠나.
(엄마의 시선에서) 돈 안 되는 일에만 집착하는 아들내미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우리 엄마, 울 엄마는 내가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20년 동안 해오는 동안에도 꽤나 오랫동안 이 일을 "봉사활동"이라고 지칭했다. 내가 아무리 이건 내 직업이고, 엄마 아들은 봉사를 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봤자 소용없었다. 그러다가 책을 낸 뒤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 일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아무런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일. 엄마가 보기엔 여전히 이런 건 '일'이 아닐지도. 그런 까닭에 주인공 엄마를 보면서 나는 자꾸만 울 엄마가 생각났다. 울 엄마가 주인공의 엄마보다야 더 친절하고, 다정하고, 자식에게 더 헌신적이지만 말이다.
주인공의 엄마(사실 엄마가 주인공이고 딸을 '주인공의 딸'이라고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내 위치 때문에 딸을 주인공으로 놓게 된다)는 노인요양보호사 일을 한다. 늙어가는 몸으로 죽어가는 몸을 돌보는 일. 자신의 일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딸의 미래를 본다. 늙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으니까. 젊은 시절 크게 날렸다지만 지금은 무연고자처럼 아무런 대접도 못 받고 오히려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젠이라는 할머니를 돌보면서, 마찬가지로 젠의 과거처럼 사회적인 가치를 살아가는 딸의 미래가 지금의 젠처럼 될까 봐 두려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결혼하고 애 낳는 사회의 일반적인 구실을 하지 못하는 딸을 보며 자신의 미래가 젠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주인공의 엄마는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울 엄마도 그랬다. 지금은 쉬지 않고 집안일을 하시지만, 예전에는 쉬지 않고 우리 집의 집안일과 다른 집의 집안일을 했다.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해주며 돈을 벌었다. 아빠의 사업이 잘 안 되거나, IMF로 아빠가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가 망해버렸을 때면 엄마는 더 열심히 일했다. 돈을 벌어도 돈이 모이는 게 아니라, 잠시 내 통장에 머물다 은행빚으로 나가는 돈벌이의 고됨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어디 가서 잘난 척하고 떵떵 거리는 데에, 책 썼다고 강연 몇 번 나가서 작가님 소리 듣는 것에, 내 삶 어디에나 실은 엄마의 젊은 시절 노동이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주인공 엄마가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자꾸 엄마의 고생이 생각이 나버렸다.
주인공이 시위를 하다 다친 현장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혼비백산한 주인공의 엄마를 보면서는 내가 집회 다니면서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연행되어 유치장에 잡혀 가고, 병역거부로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할 때 울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 생각하게 되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속상했고, 슬퍼졌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소설에서도 끝내 주인공과 엄마가 대단한 화해를 하거나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는 않는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는 대사로 끝맺는데,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희망적인 엔딩이지 않나 싶다. 결국에는 부모 자식 간에도 완벽한 이해란 존재할 수 없으니. 업보처럼 투닥거리면서도 도려내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도 있는 거니까.
나는 적어도 이 소설의 주인공들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엄마에 대하여,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이 오래 머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