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처음이라>를 시작하며
평화에 대한 책을 생각 중인데... 함 써보시지 않겠어요?
빨간소금 출판사 임중혁 대표님이 책을 써보자고 제안을 주셨다.
'오호라 기다리는 것이 왔구나'
사실 빨간소금에서 연락을 주기 전부터 나는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전쟁없는세상으로 돌아오면서 줄곧 생각했던 일이다. 책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1. 글쓰기는 활동가의 의무
활동가라면 자기 생각과 주장을 세상을 향해 널리 알려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뜻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사회변화는 가능하고,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장과 생각을 말하고 설득해야 한다.
요즘 같아서는 영상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영상보다는 글이 편한 사람이었다. 나에겐 유튜브는 멜론의 대체자였을 정도니.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결국 글쓰기였고, 평화운동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활동할 것을 권유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야기가 더 넓게 확산되기 위해서 내 글들이 책이 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2. 떠나야 할 때 떠나려면 용돈벌이라도 있어야
대학 졸업 후 줄곧 전쟁없는세상에서만 일해왔던 내게 5년 정도 출판사 편집자로 외도한 일은 내 나름의 시야와 세계를 넓히는 좋은 경험이었다. 회사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보며 '아 정말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겠다'라고 느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업무에서는 굉장히 능력 없어 위아래에서 무시당하는데 회사 밖에서는 노조나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집회나 행사에는 아주 열심히 다니며 삶의 만족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저렇게 나이 먹고 싶진 않다. 능력 없어서, 돈 없어서,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전쟁없는세상에 지박령처럼 눌어붙어 있고 싶지 않다.
떠나야 할 때 과감하게 떠나려면, 생계까지는 아니어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기술은 없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글쓰기였다. 책 내서 돈 벌지 못한다는 거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책 두어 권 내고 나면 여기저기 강연 요청 들어오고 그러면 얼추 용돈 벌이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용돈이라도 벌 수 있다면 떠나야 할 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다면 튕길 필요도 없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시간도 에너지도 아깝지 않다.
이미 내 마음은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글 몇 편 쓰는 것과 책을 한 권 쓰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과연 내가 쓸 수 있는지 신중하게 판단하고 싶었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책 쓰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시공간을 내가 마련할 수 있을지, 책을 꼭 내야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나에게 있는지 고민해봤다.
언제나 그렇듯 고민은 신중하고 짧게 했다. 책을 쓴다고 가정하고 목차와 컨셉을 잡아보았다. 부족한 부분은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오리에게 조언을 구해서 채웠다.
그리고 출판사를 만나 바로 계약했다.
처음에 구성했던 컨셉은 일종의 역사교양서였다.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다양한 비폭력 평화운동을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이야기로 들려주는 컨셉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당시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병역거부 운동, 남아공 아파르트 헤이트 시절 인종차별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 이런 챕터를 한 열 개 정도 쓰려고 했다.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영어와 의지(시간). 한국어로 된 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내 영어실력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공부하려면 거의 단행본 한 권 쓰는데 박경리 작가가 토지 완결하는데 걸린 시간만큼 걸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의지. 출판사 다니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책을 내기 위해서는 컨텐츠도 중여하지만 작가가 되고자하는 의지가 더욱 중요했다. 내 안의 목소리가 자꾸 내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전업작가도 아니면서, 내 시간 쪼개 가면서 책을 쓸 수 있을까. 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이 큰 것도 아니고, 자기 관리 철저하게 하는 독종도 아닌 내가.
나를 강제할 약속을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때마침 서울NPO지원센터에서 활동가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활력향연' 프로그램 공지가 나와서 쓰기로 한 책 내용으로 신청을 했고 운 좋게 선정이 되었다. (사실 NPO지원센터에는 출판사와 이미 책을 내기로 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떨어질까 봐. 매니저님들 너무 늦은 고백이지만 죄송합니다ㅠㅠ)
활력향연은 아주 구체적인 조언을 해줬다. 내용인즉슨, 평화운동 외국 사례를 국내에 소개할 것이 아니라 평화운동 자체에 대해서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외국 사례 소개해봤자 활동가들이나 관심 갖지 시민들은 큰 관심이 없을 거라는 지적이었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빨간소금 출판사와 대중역사서 형식으로 내자고 한 것도, 활동가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는 책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다만 활력향연 연구보고서를 내야 하는 마감 시한까지 역사서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한 일정이기도 했다.
피스모모 아영도 내게 비슷한 조언을 해줬다. 우리는 평소에 평화운동의 바운더리를 넓히는 노력이 정말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했다. 덕분에 나는 아주 쉽게 설득될 수 있었다.
컨셉을 바꾸고 연구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쓰는 일은 예상했던 것만큼 어려웠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아이디어들이 막상 글로 써보니 너무나 허접한 수준이거나 공개할 만큼 생각이 여물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당혹스러웠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세상만사 모든 것이 다 평화의 문제'라는 인식을 벗어나서 평화의 구체적인 얼굴을 지목하면서도, 동시에 내 주장이 무엇이 평화운동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구분 짓기 하는 방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맹탕인 이야기를 안 하려니 판관 노릇을 하게 되고, 판관이 되지 않으려 하면 맹탕인 이야기만 나왔다.
고심 끝에 내가 찾은 방법은 질문하는 방식을 바꾸는 거였다. '가정폭력에 맞서는 것은 평화운동인가요?'라는 질문을 '평화운동은 가정폭력에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개입해야 하나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좀 더 부연설명하자면 모든 가정폭력에 대해 평화운동이 뭔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애매하게 느껴지지만, 참전군인 출신의 아버지가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경우 평화운동은 분명하게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있다. 폭력의 기원, 폭력의 양상, 폭력의 사회적 영향력에서 군사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평화운동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비폭력의 힘-평화운동이 궁금한 시민들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조그만 책자를 완성했다. 단행본 한 권도 안 되는 분량의 보고서였지만, 마무리하고 나니 괜스레 뿌듯했다.
이제 다시 출판사를 만날 시간이었다. 원고지 280매 분량의 원고를 완성했지만 처음 의논했던 책의 컨셉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다행히도 임중혁 대표님은 이 구성도 흥미롭다면서 처음에 의논했던 컨셉은 그것대로 평화운동 다루는 역사책처럼 내고 이걸로 다른 책을 내자고 하셨다. 빨간소금 출판사에 '처음이라' 시리즈가 있다면서 <평화는 처음이라>라는 제목으로 평화입문서를 내자고 하셨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책을 두 권이나 써야 한다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그냥 해보자 마음먹었다. 쓸 때는 힘들어도 다 쓰고 나면 분명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평화는 처음이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목차를 구성했으니, 책이 나오기까지는 아직도 적어도 서른여섯 번의 위기가 있을 겁니다. 제 목표는 올해 상반기 안에 책의 초고를 출판사에 넘기는 겁니다. 그러면 올해 안에 책이 나올 수 있겠죠. 좀 빠듯한 목표 같지만 한 번 해보려고요. 이 매거진에서는 <평화는 처음이라>를 쓰는 과정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책을 쓰며 하는 고민들, 집필 후기, 혹은 때로는 책에 들어갈 챕터의 초고를 정리해서 올릴 때도 있을 거예요. 재미있게 읽으면서 많은 조언과 지적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