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적이고, 논쟁적이고, 폭력적인 평화
평화에 대한 책을 쓰려고 마음먹으니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은 과연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승만도, 김일성도, 조지 부시도, 사담 후세인도 외치는 것이 평화이고, 군대를 반대하는 평화활동가와 강한 군대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외치는 참전용사도 평화를 주장합니다.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비둘기만 나옵니다. 비둘기는 피스가 아니리 피죤 pigeon인데 말이죠. 단체 행사나 액션을 알리는 홍보물 만들려고 이미지 검색할 때마다 '비둘기 없는 평화'라는 단체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예요. 혹시나 해서 구글 영국 사이트에 들어가서 peace로 검색해보니 비둘기는 확 줄어들었지만 피스마크가 그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더라고요. 비둘기는 한국에서만 평화의 새인가...
'평화', '인권', '민주주의' 같은 말들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말이고, 모든 이들이 인권이나 평화,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치들이 굉장히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정치적이고 당파적인 가치들입니다.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peace)의 어원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평화의 여신, 팍스(pax)다. 한자로는 '범(汎)'에 가깝다. 그러니 무서운 말이다. 평화는 가장 당파적인 개념인데 보편적인 가치처럼 인식된다. 일단, '평(자체가 일반화의 폭력을 뜻하는 글자다.
로마가 가장 강했던 시기를 팍스 로마나 Pax Romana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치면 '로마의 평화'라고 해도 될 텐데요, 로마에 정복당한 입장에서도 과연 평화로운 시기였을까요? 혹은 로마에 사는 노예들에게는 폭력의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기실 우리가 평화라고 부르는 상태 혹은 시기는 팍스 로마나처럼 어떤 종류의 폭력을 은폐하거나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갈등이 없는 상태나 혼란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한다면 평화는 굉장히 폭력적인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갈등이나 혼란이 없으려면 강력한 통치자가 막강한 힘으로 다른 세력을 완벽하게 억눌러야 하기 때문이죠.
평화는 고정불변의 보편적 가치가 아닙니다. 다양한 해석이 충돌하고 논쟁하는 개념이고,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 평화의 내용 등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갈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종의 전쟁터입니다. 와, 평화가 전쟁터라니 뭔가 아이러니하죠?
평화운동 또한 비폭력주의라든지 반군사주의 같은 가치를 주장하긴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평화의 개념과 의미를 두고 투쟁하는 한 축일 수밖에 없습니다. 강한 군대가 평화를 지킨다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평화와 안보의 개념 역전 시키고 평화와 안보의 관계를 다르게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거죠.
평화의 이러한 속성을 먼저 이해해야 우리는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신나게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일어나는 장이 평화이니 만큼, 사실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에 대한 단순한 정리는 보통 도덕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진영적인 접근을 할 때 이루어집니다. 전쟁은 나쁜 거고, 특히 전쟁에서 우리와 싸우는 적군은 나쁜 사람들이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우리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이분법이죠.(재미있는 건 서로 싸우는 양쪽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쉽고 명쾌합니까.
하지만 세상만사가 이렇게 두부 자르 듯 잘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복잡한 이해관계와 해석 투쟁과 정치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평화'의 장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죠.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풀어야 합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수학은 원래 어려운 학문이니 어렵게 공부하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요. 아인슈타인은 어려운 걸 해낼 능력이 있는 천재였을 뿐이지, 그도 수학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인 줄 알겠는데, 백종원 만능 간장 같은 쉽고 간편한 해결책도 없다는 걸 알겠는데 그래도 비빌 언덕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맨땅에 해딩할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요한 갈퉁이라는 학자가 평화와 폭력의 구조에 대해 정리를 했습니다. 그는 폭력을 직접적 폭력과 간접적(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합니다. 직접적 폭력은 전쟁, 테러, 학살, 고문처럼 물리력이 동반된 폭력입니다. 간접적 폭력은 눈에 보이는 물리력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권력관계까지도 지칭하는 말입니다. 빈곤, 차별, 혐오 같은 것들이 구조적 폭력이죠.
폭력의 대척점, 폭력을 극복한 자리에 평화가 놓입니다. 평화 또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구분되는데요, '전쟁이나 군사 분쟁 같은 물리적 폭력이 부재한 상태'가 소극적 평화이고,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폭력까지 부재한 상태'가 적극적 평화입니다.
예멘 내전을 예로 들어 볼게요. 예멘 내전에서 폭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은 직접적 폭력입니다. 전쟁으로 병원이나 도로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빈곤 때문에, 혹은 제대로 된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데요, 이런 것들이 간접적(구조적) 폭력입니다. 전쟁을 피해 나온 예멘 난민이 한국에도 왔죠. 난민을 환대하고 반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난민을 혐오하는 말들도 쏟아져 나왔는데 이런 것은 구조적 폭력을 더욱 강화하는 문화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위의 그림에는 문화적 폭력은 나와 있지 않지만요)
내전을 당장 멈추는 것-물리적 폭력을 중단시키는 것은 소극적 평화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 뜻깊은 일이죠.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가난과 굶주림, 예멘 사회 내부의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간접적 폭력까지 부재한 상태를 적극적 평화라고 하는 것이죠.
요한 갈퉁의 평화와 폭력에 대한 구분은 요새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평화는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는 전쟁터입니다. 요한 갈퉁의 구분 또한 절대적인 진리는 아닌 거죠. 하지만 평화를 단순하고 단편적인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폭력 또한 눈에 보이는 현상뿐만 아니라 원인이나 구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평화와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요한 갈퉁의 정리가 큰 도움이 됩니다. 괜히 교과서에까지 실린 게 아니겠죠.
평화를 보편적인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되고, 복잡다단한 구조 속에서 인식해야 하고, 평화에 대한 정의나 개념이 절대 진리가 아니고 늘 경합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라는 게 제가 구구절절 떠든 말의 결론인데요, "그래서, 니가 생각하는 평화는 뭔데?"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을 거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몇 개만 더 살펴본 뒤에 '평화가 무엇이냐?'에 대한 저의 대답(인듯 대답 아닌 질문 같은 대답)을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