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질문의 재구성
평화를 단순하게 보지 말고 복잡하게 봐야 한다고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평화활동가, 연구자들이 평화를 납작하게 인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평화의 의미와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예컨대 서보혁, 정주진 선생님이 함께 쓴 『평화운동-이론・역사・영역』을 보면 평화를 네 가지 범주로 나눕니다. 평화학의 전통적인 영역인 '반전평화', 민주주의의 원리에 입각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민주평화', 사회적 약자의 단결을 의미하는 '연대평화', 인간 소외와 자본의 물신화와 자연에 대한 착취를 극복하려는 '생태평화'로 구분합니다.
이런 구분 방식은 평화를 '소극적 평화'로만 좁게 생각하지 않고 다양한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유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에 따르면 때로는 세상 모든 일이 평화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평화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평화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리는 거죠. 마치 모든 문장을 강조한 글은 결국은 아무것도 특별히 강조하지 않은 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요.
세상 모든 일들이 평화라고 말하는 건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평화운동을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나 스스로도 내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평화와 연관되었다는 건, 평화의 문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으니까요.
평화에 대해 뭔가 좀 더 예리한 설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일부터 생태 환경, 일상에서의 관계, 내면의 다스림, 국제 정치와 외교까지 세상 모든 일을 평화라고 이야기하는 건 그럴싸해 보이긴 해도 실상은 아무런 알맹이 없는 말잔치가 되기 일쑤였고, 그 말들에선 아무런 감흥도 구체적인 실천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감흥과 실천을 생각할 때면 2004년 평택에서 열린 '529 평택 반전평화문화축제 <총을 내려라>'에서 문정현 신부님이 평화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한 것이 떠오릅니다. (이 연설을 평화활동가 조약골이 노래로 만든 것이 바로 한국 평화운동씬의 최대 히트곡 '평화가 무엇이냐'입니다.)
저는 6개월 동안 유랑하면서 평화가 무엇인지 터득했습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청주에 갔습니다. 천연기념물인 두꺼비와 맹꽁이가 개발에 밀려서 멸종이 되지 않도록 서식처를 만들어 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성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고 싶은 곳을 쉽게 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김지태 위원장이 땅을 강제로 수용될 그 위기에 땅을 빼앗기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강대국의 침략으로 죽어가는 부녀자들, 노인들을 살려주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저는 운 좋게 문신부님의 저 발언을 라이브로 들었습니다. 쩌렁쩌렁한 문신부님 목소리를 들으며 팔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직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밤바람은 제법 쌀쌀했지만, 그래도 반팔을 입은 사람도 드문 드문 있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으니, 날씨 때문에 소름이 돋은 건 아닙니다. 전율과 감동을 느꼈던 거죠. 뭐 영상을 보신 분들이 '뭐 이런 정도를 가지고 감동씩이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저는 평화에 대한 이보다 아름다운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문정현 신부님의 발언이 큰 힘과 울림을 줬던 까닭은 평화의 다양한 모습을 언급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평화의 내용으로 언급한 각각이 당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투쟁 현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 대추리로 이사 가기 직전, 미군기지의 확장 이전을 막기 위해 대추리 농민들이 싸움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 바로 그 현장에서 토해낸 발언인 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던 이유겠죠.
저한테는 딜레마가 생겼습니다. 평화를 협소하게 해석하거나 규정짓지 않으려 하면 알맹이 없는 말의 상찬이 되어버리고, 너무 넓게 확장한 나머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다 보면 무엇이 평화가 아닌지 구분 짓기를 하고 있게 되더라고요. 그런 구분 짓기는 평화를 협소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런 자격 요건을 따지는 것이 과연 현명한 방식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거든요.
어려운 문제는 어렵게 풀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딜레마였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한마디, 한 문장, 한 문단으로 쉽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평화는 무엇을 봐야 하나?" 혹은 "평화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로 질문을 바꿔보았습니다. 맑시즘이 노동계급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세계관이고, 페미니즘이 여성의 문제만 언급하는 게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세계관인 것처럼, 세상 모든 문제들에서 평화의 문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하는 시선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한 시선, 그러한 세계관을 평화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노동자를 군대식으로 통제하는 공장, 난개발과 자원 착취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군수산업체, 장애인의 존재를 지우는 사회의 정상성 이데올로기. 남성다움을 강요하는 성별이분법에서 작동하는 군사주의. 결국 세상 모든 일이 평화의 문제라는 인식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평화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죠. 우리가 세상의 여러 문제를 평화의 시선으로 분석하고 바라본다면 지금까지 미처 바로 보지 못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에 개입하는 평화의 시선은 그 폭력의 기원을 파악하고, 폭력이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 분석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가정 폭력이 다 나쁜 것입니다만, 평화의 시선으로 가정폭력을 분석하고 접근한다면 참전 군인이 어떻게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는지 혹은 가정폭력이 은폐되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군사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시선은 '빈곤과 가정폭력의 상관관계'라든지 '가정폭력에서 성별정치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와 같은 시선과 함께 상호작용하면서 문제를 더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줍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바라볼 때 우리가 계급적인 시선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젠더분석이 필수적인 것처럼, 평화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질문은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보다 "평화는 무엇을 바라봐야 하나?"는 인식론의 전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질문이야 말로,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니까요.
머리 아픈 이야기를 잘해보려고 애썼는데, 정리가 잘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노래 하나 들으면서 같이 머리 식혀요. 문정현 신부님의 발언에 조약골이 곡을 붙였고, 실버라이닝이 힙합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평화가 무엇이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