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서평
대학 학생운동 시절 나는 세상이 명쾌해 보였다. 자본주의 대 반자본주의. 그 좁디좁은 인식의 세계에서 나는 반자본주의 혁명의 동지들과 동지가 아닌 사람들, 두 부류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가 우리 조직 사람인지 아닌지로 타인을 판단했다. 한 사람 안에 다정함과 잔인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비겁함과 용기가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대학생 때 이 책,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를 읽었다면 나는 인간에 대해서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을까?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들을 기꺼이 믿고 혁명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 같다.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운동 조직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내 경험의 일천함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어떻게 바꾸려 했던 것일까? 어쩌면 어떻게 바꿀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용감하게도 혁명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는 파리코뮌부터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한 쓰나미와 핵발전소 폭발 사고까지, 장기의 20세기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되 역사에 연루된 개인의 복잡하고 속물적이며 실존적인 고뇌와 갈등을 보여준다. 지역적으로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역동의 20세기 역사답게 각각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세계사를 두루 다루고 있다. 영화와 공연과 대중가요, 소설과 잡지 기사와 라디오 드라마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대와 조우하고 갈등하고 순응하고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사에 휩쓸려간 무력한 개인들과 역사를 이끌어가 “작은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는 콰이강이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의 피해와 가해를 다룬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분명 제국주의 폭력의 희생자지만 콰이강의 다리를 짓는 공사에서 일본군 밑에서 전쟁포로를 학대하며 공사의 중간관리자 역할을 한 조선인 군속들은 다르면서도 같은 이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서사는 폭력의 서사에서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쉽게 단정적으로 말하면 될까? 그분들이 저지른 포로에 대한 학대는 제네바협약 위반이고 인권침해기 때문에 잘못이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생각해야 한다, 제국주의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렇게만 정리하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결론이다.
이 책은 손쉬운 결론과 해결책보다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여러 상황에서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을 빌리자면) 인간이 보여주는 섬뜩한 폭력에 대해, 그리고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심성에 대해 늘어놓고 질문을 던진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잣대를 성급하게 들이대지 않고 좌절하고 분노하는, 욕망하고 갈등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이들-의사와 과학자와 여성과 혁명가와 밀정들, 예술가와 운동선수 같은 스타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은 세상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악인도 있겠지만 책은 선과 악을 오가는 이야기를, 선을 행하는 악인과 악을 행하는 선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계에 선 이들과 경계를 만드는 이들,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과 경계를 파괴하는 이들의 삶과 죽음을 들려주는데 이들은 각기 따로 존재하기도 하고 한 사람의 인생에 나뉘어 존재하기도 한다. 서로를 밀정으로 의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 천재적인 예술가가 이뤄낸 미학적 성취와 깊게 연관된 국가폭력의 그림자, 조선인도 한국인도 일본인도 러시아인도 될 수 없지만 그 모두이기도 한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 앞에선 가히 사람을 미워하는 일도, 존경하는 일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죽도록 이해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첫 출판사를 그만두고 난 뒤. 나는 그때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내가 다녔던 출판사는 진보적인 출판사로 이름난 곳이었는데, 대표이사도 유명한 진보인사였고 회사의 간부들도 굉장히 정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회사 밖에서는. 회사 안에서는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 부당해고와 노조 활동 열심히 하는 조합원에 대한 부당징계를 일삼는 치들이 회사 바깥에서는 진보정당 활동을 하고 노동자 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위선이 치 떨리게 싫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지, 나는 그 답을 찾고 싶었던 거 같다.
그 시절을 지나고 난 뒤에야 나는 인간은 원래 모순적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회사 안에서 부당노동행위를 하는 사람도 회사 밖에서 노동해방을 외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위선이든 아니든 그의 진심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받아들인 것인지 깨달은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 진심을 의심하느라 내 에너지를 쏟진 않게 되었다. 누구나 착하면서도 나쁠 수 있다는 걸, 정의로우면서도 비겁하고 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의 진보적인 진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부당노동행위를 주저 없이 미워하고 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그들의 정의로움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그들이 저지른 나쁜 짓을 긍정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 있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들처럼 모순적인 존재라는 자각과 동시에 그럼에도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그가 저지른 나쁜 짓을 용서해주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함께 찾아왔다.
인간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내 몸은 더 이상 사람을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자각은 나 스스로의 무오류성을 기각했다. 동시에 상대방 또한 나처럼 오류투성이면서도 자신의 진리를 자신만의 논리와 합리성에 입각해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도 인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우리 편의 엇나간 욕망에 대해 비판하고 적대하는 편의 합리적인 태도를 칭찬해도 된다는 것을, 그렇게 하더라도 나와 내 동료들이 바라보는 비전이 무너지지 않고 우리들의 이루고자 하는 정의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순이 때로는 역사에 새로운 틈을 내곤 한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에 따라 국회와 선관위로 출동한 군인들 개개인은 어쩌면 평소에는 아주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직업군인이었으니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지독한 가부장제 신봉자나 성차별주의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느 직업군들이 그러하듯 그들 안에도 평소에 다른 이들, 특히 약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이기적이 되거나 더 나아가 약한 사람 등 처먹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다양한 사람들이고 굳이 나누자면 착하기보다는 나쁜 사람에 가까운 사람도 있었겠지만, 국회와 선관위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들의 마음속 양심의 소리, 혹은 시민으로서 도덕이 작동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가 12월 3일의 군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정의로운 행동에만 관심을 둘 게 아니라, , 대개는 평범하거나 비루하고 때로는 비겁한 사람들이 내는 용기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인간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는 누구에게나 중요하겠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활동가들이나 정치인들에게는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상과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때로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패한 친미 군사독재 정권에 맞선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가 좋은 예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최윤필 기자는 ‘가만한 당신‘ 연재에서 크메르루주의 정치지도자 폴 포트의 처제이자 주요 4인방 가운데 하나였던 이엥 티릿의 부고를 전하면서 <폴 포트 평전>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프놈펜은 돈 때문에 망가졌다.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봐야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다.”(<폴 포트 평전> 517쪽) 인간 욕망에 대한 몰이해와, 인간을 개조 대상으로 바라본 납작한 이해가 순수한 열정이 폭력으로 변질되도록 부추긴 게 아닐까. 욕망하는 이기적인 자아와 신념을 위해 절제할 줄 아는 자아가 한 인간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폭력을 수단으로 인간을 개조하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인용된 장지락의 말, 강경 일변도였던 지난날의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 같은 말이 울림이 크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302쪽)
다시, 지금 나는 과연 인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다. 이 책을 읽고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더 어려워졌다. 내가 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알게 된 것은, 아직 나의 깜냥으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순적이고 복잡한 존재라는 걸 설핏 알았을 뿐 그 모순의 물결은 어떠한지, 복잡계의 모양은 어떤지 도통 모르겠다.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 가사를 빌리자면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다 정말. 그러니 모순적이고 복잡한 인간의 이야기를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 무얼 알겠는지 모를 때는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의 목록을 채워가는 것도 방법이니까. 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2가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