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 재욱, 재훈>, <설자은 불꽃을 쫓다> 읽고
더클래식, 이소라, 시와, 브로콜리 너마저. 3장 이상의 정규 앨범을 발매한 가수 가운데 모든 정규 앨범을 가지고 있는 가수들이다. 3권 이상의 (공저는 제외) 단행본을 낸 작가 중에서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있는 작가를 꼽아보자면 내 친구이기도 한 나동혁, 소설가 김초엽, 최은영이 있다. 과학사 책을 주로 쓰는 정인경 작가의 경우 사계절에서 나온 청소년책이 없어서 전작을 보유하지 못했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전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엄청난 애정의 척도다. 그리고 오늘 <재인, 재욱, 재훈>을 읽으면서 정세랑 작가의 모든 소설 단행본을 다 읽게 되었다!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수 없어>를 안 읽어서 모든 단행본을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흠, 이걸 보니 확실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세 명을 꼽으라면 김초엽, 최은영, 정세랑 이렇게 세 명이라는 걸 숨길 수 없다.
김초엽의 소설은 어두운 세계를 살아가지만 내면의 빛을 잃지 않는 존재들이고, 최은영 소설의 인물들은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들이라면, 정세랑 소설의 인물은 왁자지껄한 세상을 살아가는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처럼 느껴진다.
내가 무슨 평론가는 아니라서 제대로 된 분석은 아니고 그냥 느낀 바를 써보자면 정세랑 작가의 작품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먼저 변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소설 속의 세계다. 판타지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초창기 작품들에선 주로 캐릭터가 돋보인다면 최근작으로 올수록 매력적인 인물들을 감싼 세계 또한 두드러지게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중기 작품에 해당하는 <피프티 피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고, <시선으로부터>를 거쳐 최근작인 설자은 시리즈에 와서는 아예 설자은과 목인곤이 활약하는 금성이라는 세계를 아주 촘촘하게 만들어냈다. (물론 역사물이기 때문에 바탕이 되는 시공간이 있겠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 속 세계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개인적인 선호도로는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이 매력적인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는 최근작들이 더 좋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재인, 재욱, 재훈>은 조금은 아쉬울 수도 있지만, 아쉬움이란 단어는 정세랑 소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극히 주관적인 단정을 내려본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정세랑 작품에서 변하지 않는 특징, 사랑스럽고 유쾌한 인물들이 주는 즐거움이다. 독특한 구성을 자랑하는 <피프티 피플>의 경우 좀 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세랑의 인물들은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초창기의 한아, 안은영부터 최근작의 주인공들인 심시선, 설자은까지 모두 그 유쾌함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인물들이 아무런 근심걱정 없는 건 아니지만 타고난 성정이 그래 보인다는 거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통 사람'이라는 점이다. 더러는 초능력이 있고(한아뿐, 안은영, 재인, 재욱, 재훈) 어떤 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기도 하지만(심시선, 설자은)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가 아니고, 하다못해 세상까진 아니고 이웃에 사는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재인, 재욱, 재훈>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히어로가 아니라 "구조자", 혹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평범한 얼굴을 가진 인물들이다. 정세랑의 작품을 영상화한다면 지나치게 외모가 출중한 배우는 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정세랑 작가는 작품 등장인물에 주로 자신의 친구나 가족 같은 지인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던데, 어쩌면 정세랑 소설 등장인물의 특성과 작가의 이런 습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름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라는 콘셉트가 함께 따라온 거 같다.
어쩌면 아주 한국적인 히어로라는 생각도 드는데, 정세랑뿐만 아니라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할리우드의 히어로물 주인공처럼 압도적인 능력을 자랑하며 지구나 우주를 구하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착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만화가 강풀 작가가 구현해 낸 세계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 또한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보통의 착한 사람들이 조금 남다른 능력을 갖게 되면서 이웃과 주변을 구하는 이야기지 않은가. 강풀과 정세랑의 인물의 다른 점은, 강풀의 인물들은 대놓고 착하고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지구를 구하려고는 하지 않아도 적어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슨 홍반장 마냥 나서는 이들이다. 자신의 능력을 공적으로 쓰려는 착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좀 다른 의미에서 판타지다.
반면 정세랑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지만 강풀 월드의 인물들처럼 공적인(?) 활동을 하기보다는 사사로운 개인으로서 살아갈 뿐이다. 비록 비현실적인 능력이 있더라도 정세랑의 인물들은 좀 더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고, 그런 점에서 인물 자체에 더 많이 몰입하고 이입하게 된다. 내가 아니라도, 내 주변의 누군가-친구 거나 가족 혹은 동료 중에 한 명을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재인, 재욱, 재훈>을 다 읽고 나니, 이제 읽을 수 있는 정세랑의 소설은 미래의 소설밖에 없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친다. 아, 빨리 설자은 시리즈 세 번째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