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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놈들의 세상과 싸우는 썅년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리뷰

by 이용석

*스포일러 잔뜩 있음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를 봤다. 이하늬, 진선규, 조현철이 출연하는 드라마라니 망작이어도 연기는 괜찮겠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감독이 이해영이다. 이해영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를 감옥에서 봤는데 그때의 아주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 뜨겁거나 차갑지도 않은, 놀랍지도 그렇다고 덤덤하지도 않은, 뭔가가 불쑥 찾아왔는데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옆에 있는 것이니 괜찮은 거 같은, 그런 이상요상한 충격이었다. 드라마는 기대보다도 좋았다. (그러니 리뷰를 쓰지)


이름만큼은 유명한 영화 '애마부인'의 제작기를 담은 시대극이면서, 노골적으로 여성을 상품화하는 산업과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고발극이다. 3S 정책을 타고 애로영화로 돈을 벌고 싶은 제작자 구중호(진선규)와 70년대 톱배우지만 이젠 더 이상 벗는 연기가 아니라 자신의 연기를 펼쳐보고 싶은 여배우 정희란(이하늬),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쳐보고 싶은 소심한 영화감독 곽인우(조현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 다섯 명 솟옥 빨래하는 인생 탈출하려고 무작정 상경해서 밤무대 댄서를 하다가 '애마부인' 주인공으로 발탁된 신인 배우 신주애(방효린)가 영화 제작, 촬영, 개봉 과정에서 서로의 욕구와 욕망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갈등이, 섹스까지도 통제하고 관리했던 엄혹한 군사독재정권이라는 시대와 만나 코믹한 부조리극을 연출한다. 그냥 재미로만 봐도 충분하지만 재미 너머로 우리가 거쳐온 시대에 대해, 그 시대로부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야만적인 어떤 행태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썅년들'의 싸움

그들은 '썅놈'들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이 드라마의 기본적인 싸움의 구도는 단순화시키면 썅놈들과 썅년들의 싸움이다. 썅놈들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화제작자로, (극 중에서는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대사를 통해 유출할 수 있는) 감독으로, 대형 언론사의 기자로, 정부의 고위 관료로, 그리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독재자로 나오는 썅놈들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이걸 연대라고 표현할 수는 없고, 그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영화제작자는 고위 관료를 통해 독재자에게 여성 배우들을 상납하고 그 대가로 돈과 사업적 특혜를 얻고, 문화 권력을 쥔 언론사 기자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영화를 밀어주며 그 대가로 추잡한 욕망을 채운다.


반면 이 썅놈들과 맞서는 썅년들은 개별적인 존재다. 특히 드라마의 두 주인공 대배우 정희란(이하늬)과 신인 배우 신주애(방효린)는 나중에는 일종의 연대감이 형성되지만 드라마 초반부만 하더라도 가장 격렬한 갈등의 당사자들이었다. 주애가 영화사에 캐스팅되면서 제작부장의 조수로 꽂아준 친구 근하(이주영)와 주애 또한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며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한편 썅년이 아닌 여성들은 처음부터 서로 연대하는 존재들인데, 주애가 밤무대 댄서를 하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머물던 곳은 여성노동자들의 숙소였다.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친구 따라 그곳에 신세 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신세 지면서 자연스럽게 근하를 비롯한 여성노동자들과 친구가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사에서 제공한 숙소로 이사하는 주애와 작별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쟁의 중이었고, 아무런 힘도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유일한 무기는 연대투쟁인 시절이었다.


썅놈도 썅년도 삶의 전략이다. 다만 썅놈은 현상유지와 이익을 위한 전력이고 썅년은 생존과 저항을 위한 전략이라는 점이 다르다. 썅놈끼리는 돈독하고 썅년끼리는 갈등하는 드라마는 최종장에 도달하면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썅놈들의 관계는 박살 나고, 썅년들은 연대한다. 흥미로운 점은 썅놈들의 사이의 위계에 따라 파국을 맞이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상납을 주도한 영화제작자 구중호(진선규)와 최실장(이성욱)은 비참한 말로를 맞고, 애순이 없는 세상에서 온갖 추잡함을 다 떤 관식이 이재건(박해준)은 말에 걷어 차이지만, 정작 최고 권력자인 독재자는 시대와 함께 건재하다. 결국 썅놈들이 썅놈인 까닭은 성차별주의와 군사주의가 쌍끌이로 이끌어가는 세상에 맞춰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한 삶의 방식이라면, '썅년'들은 썅놈들의 세상(성차별주의와 군사주의)에 맞서기 위한 싸움의 방식으로서 '썅년'이 된 것이다.



그들 각자의 싸움


드라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주애가 영화사에 캐스팅된 뒤, 자신과 함께 가자며 친구 근하에게 한 말이다. 공장 기숙사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오늘 계약서에 도장도 찍고 영화사에서 숙소도 하나 내줬어. 너도 나랑 같이 가자. 내가 물어놨어. 제작부장 조수 자리가 비어있대."라고 말하는 주애에게 근하는 "지금 밑에서는 다들 저러고 있는데..."라며 말 끝을 흐린다. 노동쟁의를 하고 있는 동료들의 싸움을 떠나기 미안한 눈치다. 주애는 "충무로가 얼마나 썅놈, 썅년 소굴인지 알아? 혼자는 자신 없어. 다들 새로운 시대라잖아. 그런 게 남들에게만 왔을 린 없어."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나도 싸우러 가는 거야."


결국 이 드라마는 썅놈의 세상과 맞짱 뜨는 썅년들의 이야기지만,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까닭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희란, 신주애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싸움을 한다. 어떻게든 배우로 데뷔해 보려고 제작자와 자고 권력자들의 파티에 참여하길 자청하는 배우 지망생 미나(이소이)는 한껏 허세를 부리는 자신을 윽박지리는 최실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 분수를 알아서 이렇게 애쓰는 거야. 재능도 없고 운도 더럽게는 없는 년 주제에 꿈은 있어가지고. 내 분수를 아니까 애쓰는 거라고."


정희란에게 "감독님도 핑계 뒤에 숨지 마. 진짜 지킬 걸 지키려면 손에 피도 좀 묻혀보고 그래야지. 솔직히 감독님은 줄곧 곱고 깨끗하기만 했잖아."라고 지청구를 듣는 곽인우(조현철)조차도 대개는 구중호에게 끌려가고 현실과 타협하지만 그 과정에서 계속 자기가 할 수 있는 어쩌면 사소해 보이고 소심해 보일 수도 있는 자신만의 싸움을 한다. 결국엔 지더라도 말이다.


마지막 즈음에 애마부인의 주인공 안소영 배우가 특별출연한 장면은 특히 압권이었다. 드라마가 인물들의 대사로 풀어내던 각자의 싸움이 비로소 스크린 밖 현실의 이야기로 살아나는 느낌이랄까. 극중 정희란이 썅년으로 살아야만 했던 세월, 신주애가 썅년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의 무게가 안소영 배우의 실제 삶에 켜켜이 쌓여 있을테니. 이해영 감독은 그가 이 드라마를 통해 하고하 했던 말을 안소영 배우의 특별출연으로 가장 정확하면서도 상징적으로 해낸 거 같았다. 벗기려고만 하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안소영의 싸움은 과연 어땠을까?



나는 무엇과 싸우고 있을까


이들의 싸움을 따라가면서 나는 계속 나의 싸움을 생각했다. 내 직업은 평화활동가. 남들이 보기에는 직업 자체가 싸우는 일인 사람이겠지만 나는 어쩐지 나만의 싸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자본주의니 군사주의니 가부장제니 이런 거대한 사회 구조 말고, 내 일상에서 나는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 걸까.


드라마 <애마>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싸웠기 때문에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정치적인 의식이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거대한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이 되었는데, 나는 전쟁없는세상에서 하는 여러 캠페인을 정말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내 일상과 내 삶에서 어떤 싸움인지 모르겠다. 마치 링 위에 오른 권투선수가 하는 것이 그저 경기일뿐 그 자신의 싸움이 아닌 것처럼 나 또한 데모를 하고, 직접행동을 하고, 성명서를 쓰고, 기자회견을 해도 그게 나의 싸움은 아닌 것이다. 의미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 사회적으로 무척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내게는 일이다. 물론 자아실현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나만의 싸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감옥에 있을 때, 첫 회사에 들어갔을 때 나도 <애마>의 등장인물들처럼 내 존재를 걸고 내 일상에서 나만의 싸움을 해나갔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싸우고는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요즘 내가 느끼는 공허함은 어쩌면 나의 싸움의 자리를, 싸움의 상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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