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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야구

짧은 리뷰

by 이용석

계획 없이 사는 내 인생에도 꼭 이루어지면 좋겠는 꿈이란 게 몇 개 있다. 그중 두어 개는 책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내 의지와 노력 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건데, 일요일 새벽에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고아성의 북클럽'에 작가로서 출연하는 것. 팬심 때문이다. 고아성 배우는 드라마 <떨리는 가슴> 시절부터 팬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열심히 한다면 가능성이 있는 일, 야구책을 내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만 책을 쓸 만큼 대단하거나 남다른 콘텐츠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타이거즈가 야구를 잘하는 시즌에는 야구 보느라 책 읽고 글 쓸 시간이 없고, 타이거즈가 야구를 못하는 시즌에는 야구에 관심이 뚝 떨어지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야구책을 내보고 싶다. 논픽션이든 에세이든 상관없이.


<아무튼, 야구> 출간 소식을 봤을 때 부러웠다. 나도 야구책 쓰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부러움이 더욱 커졌다. 이 책은 내가 쓸 수 없는 야구책이었다. 물론 확신할 수 있는 게 나는 이 책의 저자인 김영글님보다 야구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변화구의 종류에 큰 관심이 없고, 포심과 투심의 그립이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지만, 숫자 혹은 역사 혹은 이야기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디 가서 든 야구로 수다를 무한시간 이어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가 1993년 이유는 프로야구의 두 신 양준혁(양신)과 이종범(종범신) 뿐만 아니라 구대성, 이상훈, 박충식, 마해영, 이대진처럼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선수들이 뽑힌 해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당시 해태타이거즈 2라운드 두 번째 순위로 뽑힌 대졸 좌타 외야수의 이용석이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중요한 역사 속의 시답잖은 이야기 같은 것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야구에 대해 "과몰입"하지 못한다. "모든 '처음'에는 어설픈 열이 깃들어 있다. 이 행복한 미치광이의 시간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142쪽)는 말이 어쩐지 나를 가리키는 것만 같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만 과몰입도, 어설프든 아니든 "열" 같은 것도 없다. 그냥 아주 익숙하게 그날그날의 경기 결과와 기록지를 살피고,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나름의 분석과 전망을 하고, 야구와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찾아 읽지만 내게 야구는 일상의 느낌이지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40년 가까이 야구를 좋아했고, 30년 넘게 야구를 깊게 봐온 팬이니, 처음의 열정이 30년 넘게 지속되었다면 그 열기에 타 죽었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겠지,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다 문득 이게 꼭 야구에 대한 감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것들과의 일반적인 관계가 아닐까.


나는 평화활동가로 20년 넘게 살아왔고, 평화활동가라는 직업을 무척 좋아하고 내가 평화활동가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한국 사회가 대체로 활동가들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데 그럴 때마다 마치 저평가받는 응원팀 선수를 바라보는 것처럼 화가 나기도 하고, 중요한 캠페인이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과를 내거나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면 우승한 것처럼 기쁘다. 분명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 것처럼 내 일을 좋아하고, 12번 우승을 자랑하는 타이거즈 팬으로 어깨가 올라가는 것처럼 내가 평화활동가라는 것에, 내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라는 것이 무척이나 뿌듯하다.


하지만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만 김영글 님처럼 과몰입해서 책을 쓰거나 미치광이의 시간 속에 행복감을 느끼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평화활동을 하면서 막 심장이 뛰는 설렘을 느끼거나 나의 모든 시간과 모든 감각을 평화운동이라는 대상에 집중하게 되지는 않는다. 처음이 아니니 어설픈 열이 있을 리 만무하고, 오래 지내오면서 더 오래가기 위한 나만의 속도와 호흡을 찾았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어쩐지 처음인 사람들의 에너지가 못내 부러운 건 사실이다. 내가 그런 종류의 에너지를 갖기 위해서는 여태껏 오랜 시간 쌓아온 익숙한 관계와 시공간이 아니라 굉장히 낯설고 도전적인 상황에 놓여야 하겠지. 그런데 이게 꼭 낯섦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그저 함께 있기 위해 만나는 능력을 서서히 잃어간다. 실용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는 드물어지고, 관계의 붕괴는 종종 물리적 공간의 상실과 함께 찾아온다."(116쪽) 이 문장이 책에 쓰인 맥락은 좀 다르지만,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갖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 낯섦- 그러니까 오래된 관계에서 느끼는 일종의 무뎌진 긴장감이 아니라 무용한 시간과 관계와 행위가 아닌가 싶었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로 나는 나의 말과 행동, 혹은 우리가 하는 캠페인들에 많은 것들을 담고자 한다. 정치적인 의미와 맥락들, 부족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 같은 것들. 오랜 세월 이런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부족하나마 전문성을 쌓아왔겠지만,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목적도 정치적 이익도 개입되지 않는-다시 말해 아무 의미 없는 말과 행동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사라진 것들에 '처음'만이 갖고 있는 '열'과 '행복한 미치광이의 시간'이 들어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김영글 님의 야구에 대한 저 에너지가 부럽기 그지없다고 느낀다. 그게 꼭 야구에 대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무언가에 대해 이렇게 열렬한 감정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


오랜 야구팬이라면 나처럼 김영글 님의 이 에너지를 부러워하며 이 책을 읽어도 좋겠다. 만약 당신이 야구 초심자라면 이 책이 좋은 동반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혹 야구를 아예 모르지만 이제 좀 관심 가져보고 싶다면 이 책 만한 입문서도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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