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행복

짧은 리뷰

by 이용석


"모든 선물의 꽃말은 하나. 이걸 보고 네 생각이 났다는 말.(270쪽)"


예전에는 이런 구절을 책에서 보면 낯 간지러워서 못 견뎠을 텐데, 이젠 나도 이런 마음이 좋다. 몸도 마음도 저절로 튼튼했던 시절을 지나고 나니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몇 차례 하게 되었다. 특히 몸보다 더 돌보는 게 어려운 게 마음.


몸이야 무리하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고, 무리했다 싶음 좀 쉬고, 술을 조금씩 덜 마시고, 밥 먹은 뒤에는 산책을 하고, 가능한 대로 운동을 하면 될 일. 원래 생활 습관이 바지런히 움직이는 편이라서 기본적인 칼로리 소모는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마음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고,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술 마시면 되는가 싶지만 결국 언 발에 오줌 누기. 마음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으니,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배우지도, 연습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확실히 자주 마음이 무너지고, 청소와 정리를 안 하게 되고, 집 꼬라지는 난장판이 되고. 예전 같으면 훌훌 털고 일어날 일도 오래 마음에 남아 힘들어하고. 그래도 다행인지 가진 게 많아서(내가 돈 부자는 아니지만 마음 부자고, 친구 부자니까) 남들과 비교하면 형편이 좋은 편이지만, 무쇠 마음이었던 예전과 비교하자면 자주 다치고, 회복이 쉽지 않은 것 또한 몸보다 마음이더라.


나는 그럴 때 주로 노래를 들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바른생활'과 '너의 마음이', 시와의 '새 이름을 갖고 싶어', '즐거운 안녕', 선우정아의 '그러려니', 오소영의 '다정한 위로'. 확실히 마음이 무너진 자리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건, 위로가 되는 건 노래만 한 게 없더라. 그런데 애써 다시 일어서면 뭐 하나. 다시 무너지지 않게 마음을 단단히 단련할 필요가 있다. 그때 생각난 게 바로 '루틴'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정신력이라고 하면 아파도 참고 경기에 나가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을 말하는데, 메이저리스에서는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는 힘, 일상으로 복귀하는 힘을 이야기한다는 걸 어느 인터뷰에선가 본 뒤로 '루틴'의 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일상이 무너졌을 때, 합리적 사고가 불가능하고 아무런 의지도 샘솟지 않을 때, 삶을 지탱하는 건 루틴이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산책을 하고. 평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된 행동으로서 루틴이 내 마음이 다쳤을 때 평소에 해오던 나의 알상을 돼찾아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루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제철 행복>은 그러한 루틴에 대한 이야기. 일 년 단위의 루틴인데, 자연의 변화와 절기에 따른 우리 조상들의 풍습을 함께 이야기해 준다. 24 절기가 각각 하나의 목차. 저자는 그 시기의 자신의 루틴을 설명하고, 우리 조상들의 루틴을 소개한다. 은근하고 따뜻한 시선과 마음의 온기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았던, 처음 알게 된 풍습이 있는데 바로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 입춘의 풍습 중 하나인데, 입춘 전날 밤에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던 풍습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풍속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게는 이 마음이 어떤 풍속보다 따뜻한 입춘첩으로 느껴진다. 좋은 행동을 먼저 하면 좋은 마음을 갖게 된다는 걸, 복이란 가만히 기도하여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여 만들어내는 것임을 일찍이 알았던 이들의 풍속"(30쪽)


겸손하며 부지런하고 성실한 이런 마음 가짐은 책 곳곳에 드러나 있다. 마지막 단풍놀이가 제철인 절기 상강, 낙엽을 보면서 가을이 쇠락의 계절이 아니라 낙엽이 떨어진 자리에 싹눈이 다시 솟아나고, 떨어진 낙엽 이불 아래에선 여러해살이풀들의 새싹이 자라는 순환의 계절이라고 이야기하며 카렐 차페크의 책을 인용한다.


"지금 해내지 못한 일들은 4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미래란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싹눈 속에 자리하고 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자리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185~186쪽"(255쪽)


나는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데 그 단어가 유행하는 이면에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대한 염세주의가 깔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확행의 유행은 마치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하니 개개인들이 알아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기는 하지만, 마음은 또한 육체에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경제력에 달려 있지 않은가. 그런 세상에선 자원을 가지지 못한 개인은 행복해질 수 없다. 개인의 작은 행복이란 말은 잘못된 사회 구조를 지탱하는 알리바이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저자가 이 책에서 늘어놓는 행복은 그 내용만 보자면 개인의 자그마한 행복에 가깝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태도, 이런 시선은 염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행복은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관계 속에서 위치한다. 이웃과의 관계, 세월과 인간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관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국 개인을 이야기하더라도 사회에 대한 시선을 바탕에 깔고 있기 마련.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 앞에서 겸허한 사람이 오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기 몫의 노력을 성실하게 기울이는 이들만이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돌보는 일이란 바로 겸허함을 배우는 일, 성실한 노력을 쌓아가는 일이겠지.


2025년 한 해 이 책 덕분에 제철 독서루틴을 쌓아갈 수 있었다. 덕분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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