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짧은 리뷰

by 이용석

넘나드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과학으로 시작해 음악을 거쳐서 문학을 말하는 이야기. 우주에서 시작해 강원도 정선을 거쳐 독일로 흐르는 이야기. 칼 세이건과 프리모 레비가 동시에 등장하는데 한강의 글이 인용된 이야기. 그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여성 과학사 연구자라는 정체성.


묵직한 에세이를 좋아한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 보이는 소설조차도 도달할 수 없는 삶의 생생한 결들이 들어가 있고, 사회과학책이 담을 수 없는 개인의 구체적 삶의 감정과 표정과 온도가 담겨 있으며, 역사적 시간과 사회로서 공간과 그 안의 개인이 입체적으로 담겨있는 책.


하미나 작가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야 말로 넘나드는 이야기이며 묵직한 에세이, 내가 좋아하는 책에 딱 들어맞는 책이다. 2025년 마지막 책으로 이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2025년 내내 이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강력한 체험이 이어졌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서 너무너무 좋았다.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긴 건 'Part1 두 개의 언어'였다. 과학기술사를 전공한 연구자답게 과학계의 풍성한 사례를 활용하지만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글을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과학이야기면서 음악 이야기고, 종교 이야기이고, 당신이 생각할 수 있고 없는 모든 이야기인데, 이 넘나듦이 조금 남달랐다. 장르를 넘나드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다른 언어로 말하고 다른 보법으로 걷기 때문에 기존의 구획과 구분으로는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랄까. 때문에 형식도 화법도 제각각이다. 한 책에서, 한 챕터 안에서 여러 화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몸-글


하미나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머리-글과 몸-글에 대해 설명하는데, 특히 part1은 몸-글의 방식으로 쓰인 글이라는 인상을 깊게 받았다. 머리-글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글쓰기, 좋은 글이라고 배운 그런 글들이다. 논리정연아고 그 논리를 증명하는 권위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 있는 설득하는 글.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고, 옳은 것을 설파하는 글. 독자를 의식하고 화자의 의도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글. 반면 몸-글을 규정할 수 없고 "물 같은 글쓰기"(71쪽)인데, 기존 질서가 무너진 곳 혹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당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에서 탄생"(73쪽)한다고 말한다.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은 머리-글이다. 정보를 알리는 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글, 내 주장을 설명하는 글. 온갖 성명서, 기획서, 논평, 단체 SNS 계정에 올리는 글, 평화운동에 대해 쓴 단행본까지. 확실히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히 드러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글은 자신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의 글이겠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영역만 탐색하는 머리-글로는 표현할 수가 없고, 이럴 때는 규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물 같은 글쓰기인 몸-글이 필요하다는 것. 때로 글을 쓰고 또 써도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은, 내 글이 온통 머리-글만 있기 때문인 걸까?


"여성으로서 내 경험을 쓸 때는 반드시 물 같은 글쓰기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내 몸에 차근차근 쌓인 경험들은 내가 배워온 것들, 텍스트가 가르쳐 준 것들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배운 것으로 나의 경험을 해석할 수가 없다. 나의 경험을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 내야만 한다."(326쪽)


하미나가 말하는 물 같은 글쓰기, 몸-글의 필요성을 읽으면서 나를 포함한 병역거부자들이 병역거부 소견서를 쓸 때의 난감함이 떠올랐다. 군사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전쟁이 옳고 강한 군사력만이 답이라고 배워온 사회에서 사회 보편과 다른 감각, 생각,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가 우리에겐 없었다. 우리의 말과 글은 정확할 수 없었고, 논리적이지 못했으며, 때로는 말하는 우리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내고는 했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10여 년 전, 어느 병역거부자의 병역거부 소견서에 대해 진보언론 데스크급의 기자 한 명이 굉장히 비판적으로 자신의 SNS 평한 적이 있다. 요는 그 병역거부자가 소견서에서 말하는 바가 근거도 빈약하고 논리도 엉성해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병역거부자는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그렇듯, 병역거부 소견서를 몸-글로 썼거나, 몸-글과 머리-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썼던 거 같다. 양심이라는 것이 고도의 추상적인 관념이니, 스스로조차도 논리적인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마련이다. 왜 병역거부 하냐고? 그걸 한마디 깔끔한 문장으로 설명해 내는 병역거부자는 "이라크 파병 반대"나 "촛불시위 진압 거부"처럼 구체적인 사례가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실 없다. 병역거부자들의 말과 글이 세상을 설득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그 사상의 바탕인 평화주의가 워낙에 마이너리티 한 측면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병역거부자들의 글이 몸-글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머리-글의 표본과도 같은 기사를 쓰는 기자가 보기에 몸-글로 쓰인 병역거부 소견서가 엉성하고 허점 투성이처럼 보였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당시 나는 그 가지의 포스팅에 대해 투덜거리는 글을 내 페이스북에 썼었다. 전잰없는세상의 성명서나 논평이라면 모를까, 양심이 무슨 논술시험이나 논문심사도 아니고, 그냥 병역거부가 싫은데 트집 잡는 거 같다고. 이 책을 읽고 난 뒤였다면 몸-글에 대하서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세상을 보는 방법, 페미니즘


"글쓰기는 쓰는 행위 같지만 사실은 보는 행위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354쪽)


저자는 페니미즘이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 한다. 시선(보는 행위)이 부재하다면 글(쓰는 행위)이 나올 수 없다. 세상에 없는 지식, 관점,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질문과 언어가 필요한데, 질문하는 언어는 결국 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정신의학 지식 역시 남성 중심적으로 만들어진 오염된 지식입니다. 상담에 관한 지식과 역할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여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지식들을 이용하고, 또 그것을 통해 나를 돌보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죠. 정신의학과 관련해 페미니스트적인 선택을 한다고 할 때, 지금까지의 모든 정신의학 지식을 거부하거나 여성 정신과 의사가 되는 선택지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불순하고 오염된 환자로 남으면서, 필요한 자원을 나 자신을 위해 쓰면 된다고 생각해요."(277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평화주의자들의 안보에 대한 인식과 논의도 이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세계에서 통용되는 안보에 대한 지식은 모두 군사주의적 사고에 오염된 지식, 우리는 이를 통째로 거부하는 방식으로 응대하기만 했는데 불순하고 오염된 채로 존재하면서 안보 담론에서 기존의 지식과 체계를 활용해 본다는 생각은 못해본 거 같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순 없을 텐데, 군사주의에 오염된 안보담론이 형성한 지식과 논의 체계를 활용해 강한 군사력만이 평화를 지킨다는 생각을 깨부술 수 있을지. 그래도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방식이니, 고민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을 사실물 matter of fact가 아닌 우려물 matter of concern로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을 과학과 사회, 기술과 정치, 물질과 문화가 뒤엉킨 총체로서 보기 위함이다. (중략)

한편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마리아 푸이그 들라벨라카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과학을 돌봄물 matter of care로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라투르의 '우려물'을 심화시켜, 과학기술을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이 불가분하게 얽힌 세계 속에서 돌봄의 문제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봄물에는 말 그대로 돌봄을 중심에 놓고 과학기술을 다시 바라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379~380쪽)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역시 나는 이 논의를 평화운동으로 가져와서 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학'의 자리에 '안보'를 넣고 '돌봄'의 자리에 '평화'를 넣는 것이다. '사실물'로만 바라보는 과거의 시선은 안보에 있어서는 '군사력' 중심의 안보논의가 될 것이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평화를 중심에 놓고 안보를 다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돌봄에는 우려보다 한층 더 적극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돌보기까지 한다는 것은 직접 손을 더럽혀 가며 가꾸고 고치고 유지하는 실천적 관여를 뜻한다."(380쪽)


'과학'과 '안보'라는 아예 구분되는 분야 같지만 '돌봄'과 '평화'는 내용면에서는 무척이나 가까워 보인다. 확실히 페미니즘의 언어, 인식론, 세상을 분석하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들이 평화주의에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다른 평화활동가 동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도 궁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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