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최태현 선생님과 인터뷰를 했던 인연으로 감사하게도 책을 보내주셨는데 읽지 않고 있었다. 행정학(이 뭔지도 모르면서)은 어쩐지 재미가 없을 거 같아서. 평화운동을 하면서 때때로 행정을 마주하게 되지만, 내가 하는 활동 중에 가장 재미없는 게 바로 그런 행정을 마주하는 순간들, 공무원들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다. 물론 해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지만, 세상에 공부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재미없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당연하다.
그러다 작년에 비영리활동가학교 엣지에서 지원하는 책모임을 하게 되었고, 결과공유회 때 최태현 선생님 북토크가 포함되어 있어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웬걸, 행정학이 이렇게 재밌는 학문이었나? 아니면 행정학은 실은 내가 오해한 대로 재미없는 학문인데 최태현 선생님이 이 책을 재밌게 쓰긴 건가? 아무튼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민주주의 교육가 파커 파머는 민주주의의 기초로 우리의 마음, 즉 서로 많이 다른 동료 시민을 신뢰하고 그들이 미울지라도 그들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마음을 강조했습니다. (38쪽)
민주주의는 헌법과 법률, 대통령 집무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다수결 원칙 같은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 근원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집합적 행동에 의해 구현되는 체제입니다. (232쪽)
제도와 법의 집행과 운영을 연구하는 게 행정학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마음이라니. 물론 행정학 본연의 임무(?)인 국가와 제도, 그리고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지만 최태현 선생님이 책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란 완결적인 제도가 아니고 한계가 많은 제도이며 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가장 훌륭한 이들은 리더 자리를 사양하고 "피가 흐르는 투쟁을 마다하지 않을 탐욕스러운 이들이 그 자리를 원"(200쪽)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한계 속에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공적 인프라로서 민주정부'를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점이다.
마음은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의 방향점이 되는 거 같다. '제6장 민주주의의 마음'에서 자세히 서술하는데 크게 살펴보는 카테고리만 이야기하자면 너그러움, 두려움, 사랑, 슬픔 같은 감정들이다. 뛰어난 리더나 대단한 위인이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 민주주의의 마음을 구성하는 시도가 인상 깊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마음이 작동하기 위한 사회적 공간으로 공공성을 이야기하는데 '공공성'은 '마음'과 더불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동시에, 최태현 선생님의 공공성에 대한 해석은 무척 흥미롭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공공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공공기관이나 공무원, 공조직처럼 국가 관련된 것을 공적인 영역으로 그 밖의 영역을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하기 쉽다고 지적하면서, 공공성의 公과 共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公은 나와 다른 존재들에 열려 있음을, 共은 나와 다른 존재들과 어울림을 의미"(300쪽)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를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公은 사적인(private) 것의 반대말로 공적인(public) 것의 의미이고, 共은 공동체의 공-함께 한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였다. 우리가 공공성을 국가를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은 公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일 뿐 그것을 생산할 수 있는 共에 대해서는 자각하지 못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셈이다.
최태현 선생님은 '작은 공共'의 의미를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국가보다 작은 共들이 만들어내는 공공성이 국가의 실패와 정부와 제도의 빈틈을 메꿀 수 있고, 우리의 일상과 삶에서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것도 작은 공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나 규칙이 아니라 마음을 강조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거대한 국가가 아니라, 서로 얼굴을 알고 있는 작은 공의 단위에서의 관계는 정말로 마음이 중요하니까.
최태현 선생님의 공공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문득 병역거부운동이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대체복무 분야에 관련된 질문인데, 현재 대체복무제는 교정시설에서만 시행되고 있는데 전쟁없는세상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그리고 유엔 인권기구들과 국가인권위도) 복무분야를 확대해야 하고, 사회 공적인 영역의 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 "감옥도 공적인 공간 아니냐?"는 반론을 종종 듣곤 하는데 이에 대해 대답하면서도 스스로도 명쾌한 느낌을 갖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태현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대체복무 분야로서 감옥이 어떤 면에서 공적이지만 어떤 측면이 공적이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있을 거 같다. 미국처럼 교도소가 민영화된 곳이라면 다르겠지만 한국의 교도소들은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법무부 산하 교정청 소속이다.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이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무원이니 公적 영역이 맞다. 하지만 교정시설이 共적 영역인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정시설은 그 목적이 함께 사는 것을 지향하는 공동의 주거공간이 아니라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거나 사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곳이다. 다른 나라에서 대체복무가 시행되고 있는 사회복지나 노인 돌봄, 재난 대응 같은 분야들은 共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公적인 기관이라면,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서 하는 대체복무는 共적인 가치 구현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公적인 공간에서 공무원公務員들이 하는 일을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복무 분야가 교정시설로만 한정되어 있는 현재 한국의 대체복무를 공공성이라는 잣대로 판단해 본다면, 共적인 지점에서 낙제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