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강의 준비를 위해 써본 글로 미완성입니다. 계속 수정해갈 생각입니다.)
행복하게 활동하기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참 어려운 주제다. 행복하게 활동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걸 말로 정리해서 하려니 감이 안 온다. 역시 글을 써야 생각이 정리되는 법. 일단 써보자. 쓰고 고치면 되니까.
행복한가요? 나는 이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행복하지 않다. 인생에서 때때로 행복한 일만 가득한 시기가 있거나 불행한 일만 가득한 시기가 있을 순 있는데, 대개의 경우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행복한 일 안에서도 불행의 씨앗이 있다. 호사다마 아닌가. 마찬가지로 불행한 가운데에서도 행복의 단초가 있다.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서 불행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소확행도 느끼고 다양한 행복을 느낀다. 그 행복은 수감생활이라는 커다란 불행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 그래서 나는 늘 누군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행복과 불행을 두부 자르듯 나누어 생각할 일이 아니고, 우리의 삶에 행복만큼이나 불행(혹은 비슷한 상황이나 부정적인 감정들) 또한 중요하고 필요하다. 너무 과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행복이 화두가 되고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서 행복을 찾는 까닭은 현실의 불행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우리의 뇌가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태를 더 잘 인지하거나 기억하도록 진화한 것은 그 편이 우리의 생존을 어렵게 하는 위협이나 위험을 감지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돌려 말하면 불행에 가려지기 쉬운 행복을 우리가 감각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닐까?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 혹은 이미 존재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행복을 감지하려는 노력말이다.
지난 일들을 기억하나요 애틋하기까지 한가요. 나는 잘 잊어버리거든요. 행복해지려구요 (브로콜리너마저 '행복')
나는 언제 행복하다고, 더 구체적으로 내 직업과 관련해서 활동가로서 언제 행복하다고 느낄까? 행복은 어쩐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이 강해서 내가 자주 쓰는 단어로 바꿔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나는 평화운동을 하면서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얼마 전 만난 오랜 친구는 자신은 의미 100%의 인간이라면서 사회변화의 최종병기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이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에게 재미있는 일이기도 해야 한다. (물론 사람 사는 일이 어찌하고 싶은 일만 하겠나. 나도 이렇게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도 많이 하곤 한다.) 의미면 어떻고, 재미면 어떠하랴. 자기가 무엇으로 움직이는 사람인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는 의미로 움직이는 사람이고, 누군가는 관계가 가장 중요할 것이고, 나는 재미와 의미의 밸런스가 중요한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활동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중요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차려야 하고, 서로 다른 욕구를 인정하면서도 그 사이의 교집합을 찾는 게 중요하겠지만 그게 되기 위해서라도 우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이용석)에게 중요한 건 다시 말하지만 '재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 때 일과 삶에 재미를 느낄까?
"패배를 통해서 배우는 건 아주 많아. 하지만 이겨서 배우는 건 훨씬 더 많거든. 게다가 이기는 게 훨씬 기분 좋잖아? 자, 가자!" (만화 H2 주인공 히로의 대사)
활동가들은 승리와 패배가 명확히 구분되는 이분법의 폭력적인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이고, 경쟁보다는 협력을 기본 마인드로 장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성공'이나 '성취' 같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에 대해서는 어색해하는 분위기도 있다. 물론 요즘은 그런 경향이 좀 줄어든 것 같지만.
각자의 기질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아무리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금이 하나도 가지 않는 일은 없으며, 작은 실금들이 꾸준히 쌓이다 보면 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커다란 균열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의미만으로 지속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사회(혹은 주변)의 인정이 없다면 활동가들이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의미'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사회적인 단어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일을 혼자서 의미 부여하는 건 오래가지 못한다.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작은 성공을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예로 들어보자면 전쟁 중단이라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을 하지만 이건 달성하기도 어렵고 성과를 측정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필요한 좀 더 구체적인 수준의 캠페인을 기획한다. 병역거부 캠페인, 무기거래 감시 캠페인처럼. 그리고 그 캠페인은 각각 더 작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사업들로 구체화된다. 병역거부 캠페인의 경우 대체복무제 도입(지금은 개선)이라는 목표를 수립하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서 필요한 사회변화 지표들을 더 잘게 쪼개고 그 지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니다. 병역거부자 100명 조직, 유엔의 메커니즘의 한국 정부에 대한 권고 이끌어 내기, 대체복무 법안 발의 등등이 그러한 계획이다. 전쟁 중단, 대체복무제 도입은 막막하지만 이런 계획들은 충분히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하다.
성공과 성취가 없는 캠페인도 사회에 커다란, 중요한 영향을 남기기도 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당장 전두환의 집권을 막지 못했으니 실패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이후 한국 사회운동에 남긴 족적을 생각한다면 이를 실패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건 역사적 평가인 거고, 당장 그 활동을 이어가는 활동가들에게는 지치지 않고 꾸준히 활동하기 위한 작은 성공이 꼭 필요하다.
활동가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성취를 만들어놓고도 자신의 성취를 미완성이라고 평가절하하거나 아직 남은 한계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변화는 미완성이다. 한 번에 바뀌는 그런 세상은 없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계는 캠페인 성공의 일부분이다. 한계가 없는 변화는 없으며, 내재된 한계 덕분에 우리는 다음 캠페인을 기획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작은 성취와 변화를 축하하지 못하는 이러한 모습은 개개인의 성향과 성격 때문에 발현되기도 하지만, 조직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후자의 경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작은 성취를 축하하고, 작은 성취를 쌓아갈 수 있게 노력하는 일은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에 더해 조직적인 노력이 함께 되어야 한다.
작은 성공을 쌓아가는 일은 의미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인 동시에, 변화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하나씩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마치 게임의 스테이지를 하나씩 클리어 해가는 느낌이 들어 재미의 요소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게임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사회운동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작년 엣지에서 기획했던 활동가의 공부에 대한 강의에서 정희진 선생님의 말이 무척 인상 깊었다. 사회운동의 목표는 사회변화가 아니라 활동가의 성장이어야 한다는 말. 정희진 선생님 특유의 화법을 이해한다면, 사회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활동가의 성장이 사회변화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성장하지 않는 활동가가 사회변화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활동가의 성장은 사회변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리고 성장은 개인에게 의미와 재미 모두를 가져다준다. 내 경우엔 앞 길이 막막하고, 뭔가 내 활동이 벽에 부딪혔다고 느끼는 순간들의 경우는 대개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다. 그럴 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험, 다른 시선, 다른 공부가 필요해진다. 나는 운이 좋게도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다녀왔고, 출소한 뒤 활동을 이어가다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감옥과 직장생활은 당시에는 나에게 꼭 긍정적이기만 한 일은 아녔다. 나의 적극적인 선택은 아니었고, 감옥과 직장에서 겪은 일들은 충분히 당시의 나를 힘들게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경험은 활동가로서 나를 성장시켰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착하디 착하고, 정치적으로 너무나 올바른 평화활동가들(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지만)을 만나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배움과 성장이 내가 활동가로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래 사람들은 성장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장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들은 대개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하며 성장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 작품들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우리는 주인공의 성장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도 자신의 성장을 무척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장이 중요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성공을 쌓아가는 일이 중요하지만, 성공만 쌓아가는 일은 활동가들을 캠페인 기계로 만들 수도 있다. 사회운동은 사회변화를 일구는 일이고, 사회변화는 때로는 법과 제도의 변화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의 삶과 인식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두 가지 모두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고, 설득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좋은 이야기 하는 사람을 넘어서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무슨 행복해지기 위한 것에 대한 글에서 맨날 노력하라고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원래 행복이란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무언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적절한 노력의 결과로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 낼 때 얻는 것이다. 로또 맞으면 행복하지 않냐고 반론할 수 있는데, 물론 로또 되면 행복하겠지만 인생은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연속된 드라마지 않나. 로또를 연달아서 지속적으로 당첨될 수 없다는 거 우리 모두 잘 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나는 톨스토이 의견에 반대한다. 행복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가정이든 개인이든. 그리고 저마다의 이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일 수 있다.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다. 내 옆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오리는 퍼진 라면을 먹는 걸 행복해하지만 나에겐 퍼진 라면을 먹는 일은 고문인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이 지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남들이 나와 다른데 프로야구, 보드게임, 자전거 여행 책이나 드라마 보고 수다 떨기, 맛난 거 먹기 같은 걸 하면 행복해진다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게다가 활동가의 경우에는 그 일이 의미까지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일과 개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작은 단체일수록, 그 단체의 창립멤버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활동가도 결국 인간. 사적인 욕구와 욕망이 있고, 감정이 있고, 정신과 육체에 한계가 있는 사람이다. 밤에 잠을 잘 때 뇌가 쉬면서 새로운 뇌세포가 태어나고 오래된 세포가 사멸하듯이, 활동가들의 삶에도 새로운 활동세포가 자라나고 오래된 활동세포가 스스로 사멸할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잠을 자는 일일 수도 있고, 프리다이빙일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일(활동)과 상관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활동가들에게 적극적으로 활동가가 아닌 친구들을 사귀고 만나라고 이야기하는 편인데, 활동가들만 만나면 시야나 사고방식이 고정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시간이 활동가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꼭 친구가 아니라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혼자 보내는 시간일 수도 있다. 많은 활동가들이 일을 덜 하거나 잠시 활동에서 멀어져 있는 시간을 불안해한다. 왜 아니겠나. 내가 휴가를 떠난 날 갑자기 트럼프가 이란을 침공하는데, 혹은 중요한 법원 결정이 갑자기 나서 입장을 내야 하는데. 그런데 사회변화를 만드는 사회운동은 마라톤이다. 그것도 42.195Km가 아니라, 엄청나게 긴 길이를 혼자서 완주하지도 못한 채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이어주는 이어달리기 마라톤. 인생이 걸리는 일인데 찰나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달릴 길이 구만리인데 중간중간 계속 단거리처럼 스퍼트를 해서는 되겠나.
좋은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행복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가가 아닌 개인의 삶을 돌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