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러브 앤 아나키를 보고
* 이 글은 "러브 앤 아나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본 스웨덴의 넷플릭스 시리즈 “러브 앤 아나키”에서는 주인공들이 공공장소에서 나체로 다니는 모습을 두번이나 보여준다. 한번은 수영장에서, 한번은 가족 모임에서. 그들의 나체는 반항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인다.
내가 주목했던 건 나체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반응이었다. 특히 수영장에서는 사람들이 환호를 하고 휘파람을 부는 등 오히려 나체를 통해 본인을 표출하는 것을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다. 만약 한국의 수영장에서 실제로 어떤 젊고, 멀쩡한 사람이 장난 삼아 수영복을 탈의한 채 걸어다녔다면 사람들이 크게 충격을 받고, SNS에서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애초에 수영장 또는 가족 모임에서 본인의 나체를 드러내는 연출 자체가 크게 이슈화될지도 모르겠다.
이 드라마에는 주인공들의 나체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이 본인의 직장 사무실에서 몰래 자위 행위를 하다가 걸리는 등 성에 대한 굉장히 개방적인 시각이 보여진다.
예전에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온 스웨덴 친구랑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성이 한국에서 왜 그렇게 금기시되는 주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스웨덴에서는 성행위가 일종의 스포츠 같은 행위이며, 사회에서 건강한 성행위는 오히려 장려되지 절대 금기의 대상은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스웨덴의 성적 개방성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두 가지가 궁금했다.
첫번째. 이러한 사고방식이 과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a. 스웨덴은 성이 금기시되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한 성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성병 및 다양한 피임도구 사용법에 대해 교육을 진행하며, 그 결과 스웨덴의 10대 임신율은 전 세계 최저 수준이라고 한다.
b. 스웨덴 보건당국 산하에 있는 기관에서 2017년도에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전연령층 (만 16세~84세) 국민의 과반수 이상인 58%가 본인의 성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고 한다.
(출처: https://bit.ly/3s9sTw1)
성에 대한 윤리적 관념은 배제하고 본다면, 이 정도면 사회 전체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복 관련 관점에서도 스웨덴의 방식이 성을 금기시하는 방식에 비해 WIN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두번째. 스웨덴은 어쩌다가 성에 대해 이토록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을까?
구글링을 해보니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국가들이 성에 대해 굉장히 개방적인 국가로 인지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미국의 네이버지식인 격인 Quora에서 “핀란드 사람들은 집에서 나체로 지내나요?” 하는 질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관련 Quora 질문: https://bit.ly/2XnKQZp)
그들의 개방성이 단순히 서양 문화권이기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이러한 사고 방식을 야기시켰는가?
내가 분석한 스웨덴의 성적 개방성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본인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하면서도,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보다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가치를 중시한다.
위 그래프는 World Values Survey라는 곳에서 전세계 국가들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구성한 World Cultural Map이다.
(출처: https://bit.ly/2MFyUQG)
x축이 행동양식의 기반이 되는 가치에 대한 축이다. 왼쪽이 “생존 모드”라면, 오른쪽으로 갈 수록 생계에 대한 고민보다는 본인을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쪽에 가치를 두는 “자기 표현”을 중시하는 나라들이 있다. 개발도상국들은 거의 다 왼쪽에 포진되어있고, 북미 및 유럽의 선진국가들은 오른쪽에 포진되어 있다.
y축은 도덕적 가치와 관련이되는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단에는 종교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가치들을 중요시하는 국가들이 있고, 상단에는 실용적 가치들을 중시하는 국가들이 있다. 무슬림 국가들이 가장 하단에 위치한 반면, 유럽 및 북미 국가들은 모두 상단에 위치해 있다. 그 중에서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는 가장 위에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자기 표현”을 중요시하면서도 종교보다는 실용적 가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성에 대한 개방성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미국이 겉으로는 매우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본인들이 인지하기에 북유럽에 비해서 어느정도 성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미국의 청교도 정신 때문일 것이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남녀 주인공은 드라마 제목처럼 ‘아나키’를 추구한다. 여기서 아나키는 무정부주의 보다는 난장판, 또는 혼란 상태의 의미로, 두 주인공은 서로 내기 따먹기를 하며 행사 전체의 불을 나가게 하는 소동을 펼치기도 하고, 호텔 수영장에서 나체로 다니기도 하고, 회사 미팅 자리에 공사장 직원들을 초대하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특히 여자 주인공은 본인을 억압하는 권위적인 남편,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는 아버지, 아버지와 남편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딸 등으로 인해 겪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남편과 본인의 친구들 앞에서 동물처럼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샤워가운 차림으로 회사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한다. 이러한 연출은 스웨덴 사람들의 온전한 자유를 향한 갈망을 나타냈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자본주의라는 사상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며, 본인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강조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통적 가치 보다는 실용적 가치를 중시하는 스웨덴의 현 사회를 보여준다.
2.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가치로 생각하되 높은 수준의 국가적 개입을 허용하는 “국가적 개인주의 (Statist Individualism)”를 표방한다
스웨덴은 자본주의 체제이지만, 강력한 소득 재분배 정책을 펼치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짙은 나라이다. 내가 여기서 궁금했던 것은 집단주의를 기반으로 국가의 공격적인 개입을 허락해주는 사회주의와 개인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였다. 집단을 강조하는 국가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집단을 매우 의식하기 때문에 개인 멋대로 행동하기가 매우 어렵다. 극단적으로, 북한이 그러하다.
스웨덴의 경우, 다음과 같이 국가적 개인주의가 실행된다.
개인은 국가를 신뢰하기 때문에 국가의 공격적인 개입을 허용한다. 예를 들어, 적게는 30%, 많게는 60%까지도 올라가는 개인소득세를 낸다.
대신에 국가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복지국가로서의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스웨덴은 무상으로 대학 교육을 제공하며, 남녀가 상관없이 16개월간 유급 육아휴직을 쓸 수 있으며, 매년 25일 즉 5주간의 유급휴가가 발급된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유급휴가는 15일로 약 3주이다)
따라서 집단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측면에서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국가가 정책을 실제로 펼치는 방식은 개개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드라마에서도 비정규직이었던 남자주인공이 정규직이 되어 이러한 복지 혜택들을 누리게 되어 크게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출판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아이에게 사정이 생겼을 때는 미팅에 오지 않고, 여주인공 역시도 유연하게 원할 때는 재택 근무를 하고,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외출을 하는 모습에서 스웨덴의 유연한 직장 문화가 드러난다. 다만, 또 한편으로 든 생각은 1번에서 언급됐던 것처럼 실용적인 가치와 자기 표현을 중시하는 현 세대는 “국가적 개인주의”에 있어 국가주의보다는 개인주의에 비중을 두고 있고, 따라서 두 남녀 주인공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단순히 본인을 억압하는 일상적 스트레스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스웨덴의 사회 체제 자체로부터의 해방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주인공이 하는 장난들이 단순히 본인들이 다니는 회사를 혼란 상태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출판 산업 종사자들이 모인 행사, 호텔 수영장, 남자 주인공의 가족 모임, 스파 근처의 길거리 등 일상 곳곳에 전파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최대의 복지를 보장해주는 국가적 정책과 자기 표현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개인적 가치관이 결국 “러브 앤 아나키” 속의 누디티를 등장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성에 대한 개방성은 결국 스웨덴이 표방하는 가치를 드러내주는 한 가지 예시에 불과하며, 스웨덴의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벗을 수 있는 자유"는 사실은 그 뿌리가 꽤나 깊은 권리이다. 다만, 이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을 토대로 감히 판단하자면, 현 세대를 살아가는 스웨덴 사람들은 보다 더 자유롭길 원하고, 보다 더 체계와 시스템으로부터 해방된 온전한 개인으로서 존재하기를 원한다.
덧붙이는 말
나는 스웨덴을 보면서 사실은 대한민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이 완전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르는 국가임에도, 집단주의적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은 집단적 분위기를 매우 의식하며 행동한다. 즉, 항상 눈치를 봐야 한다. 스웨덴은 대한민국 국민인 내가 봤을 때는 이미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데도 체제를 깨부시길 원하고, 오히려 대한민국 국민들은 “헬조선”을 말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에서 정하는 것들은 다 엄격하게 이행한다. 코로나에 대한 방역 수칙을 지키길 거부하며 시위하는 유럽 국가들과 방역 수칙을 대체로 모두 엄격하게 지키는 우리 나라 국민들을 보면 그러한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러한 “체제 순응적” 정신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이 주제는 다음에 더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