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로리 파트 2 정주행 리뷰
또 한번 인생 1.5일을 더글로리 보는 데 썼다. 넷플릭스에 출시된 금요일 저녁부터 빨려들어가듯이 시청하였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남은 분량을 정주행하고 나니 벌써 토요일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웰메이드 드라마 인정이다. 여운이 남아 곱씹어보다가 다른 복수극과 더글로리를 차별화하는 신의 한 수 5가지를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다음 내용은 더글로리 파트2에 대한 강력한 수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고구마가 될 뻔했던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바로 문동은이 모든 복수를 끝내고 폐건물에 올라가서 자살을 할려고 했을 때이다. 만약 동은이가 이 때 죽었다면, 드라마는 고구마 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다. 동은이는 복수를 하였지만 본인을 괴롭힌 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통쾌한 복수라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본인의 아들을 살려달라는 주여정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동은이는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폐건물 옥상에서의 만남 이후 동은이의 태도는 변했다.
그녀는 살기로 결심했고, 건축대학원에 등록했다. 밝은 색상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당당하게 걷어붙이고 다녔다. 본인의 재능을 살려 (?) 주여정의 복수를 돕기 시작했다. 동은이에게 여정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과거의 꿈이 오직 박연진이었던 동은이에게 복수극이 끝나고 살려야만하는 대상인 여정이가 나타났고, 그의 복수를 도와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나저나 드라마를 보며 드는 개인적인 생각은 동은이도 참... 목표지향적인 인간이다.
나는 동은이가 흉터 치료를 하지 않고 그대로 당당하게 산다는 설정이 참 좋았다. 그만큼 그녀의 내면이 견고하고,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최고의 복수는 잘사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동은이가 모든 복수를 끝내고 당당하고 행복해짐으로써 비로소 동은이의 복수극은 완성되었다.
이 드라마에는 무려 12명의 악인이 등장하는데, 이 악인들의 파멸이 그 어떤 복수극보다도 시원하고 깔끔했던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결정적 순간에 이들을 파멸로 이끈 건 스스로의 악행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항상 최후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총을 세팅한 건 문동은 또는 강현남이었지만, 실제로 방아쇠를 당긴 건 인물들 본인이었다. 김사라는 본인의 의지로 교회에서 다시 약물에 손을 대어 사람들에게 본인이 약물중독자임을 노출시켰다. 정보를 흘린 건 강현남이지만, 결국 돈을 뜯어내기 위해 홍영애를 협박하기로 선택한 건 강현남의 남편이다. 계속 꾸준히 악하기로 선택한 인물들 자신이 결국 복수극을 성공적으로 완성시켰다.
두번째는 이들을 파멸시키는데 문동은, 강현남, 그리고 주여정은 한번도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범죄를 저질러 서로를 파멸시켜 버리는 건 12명의 인물들이다.
특히 박연진파 인물들이 서로를 배신하고 공격하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다. 이들의 관계성은 마치 젠가 게임을 연상하게 했다. 겉으로는 사이가 좋았지만 사실은 위태롭던 그들의 관계는 위기의 순간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손가락으로 한번 건드리기만 하면 공들여 쌓은 탑 전체가 알아서 무너져 버리는 젠가처럼 말이다.
문동은이 가장 잔인하게 복수하고자 했던 대상인 박연진은 무려 5단계에 걸쳐 벌을 받는다.
1. 사회적 죽음: 학교 폭력과 살인 의혹이 이슈가 되며 사회적 질타를 받고, 기상캐스터로서의 커리어를 중단하게 된다.
2. 가정의 파탄: 본인의 영광이었던 건설회사 사장 하도영과 이혼을 하게 되고, 사랑하는 딸 예솔이가 엄마의 실체를 알게된다.
3. 감옥행: 살인자임이 밝혀져 결국 감옥에 살게 된다.
4. 엄마의 버림: 가장 든든한 울타리였던 엄마의 버림을 받는다. 문동은에게 "너같은 년들은 가족이 가해자"라는 말을 똑같이 되갚음 받는다. 감옥에서 본인을 모른척하는 엄마를 보면서 그 어떤 벌을 받을 때보다도 비참하게 절규하는 모습을 보인다.
5. 교도소 내 폭력: 항상 안하무인의 자세로 살았던 박연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인보다 강자인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오로지 신체적인 힘으로만 이겨야 하는 교도소 생활에서 박연진은 살기 위해 비참한 모습으로 방 안 구금자들을 대상으로 기상캐스터 흉내를 내게 된다.
이 중 가장 박연진에게 임팩트가 큰 벌을 꼽으라면 4번, 엄마의 버림과 5번, "교폭"일 것이다.
엄마의 울타리는 박연진의 가장 견고한 벽이 되어주었다. 기상 캐스터 커리어나 기업가 남편과의 결혼, 이런 것들은 박연진에게 현모양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반짝이는 악세사리같은 것이었다. 하도영과 이혼하는 장면과 기상 캐스터를 관두는 장면에서 박연진은 여전히 당당했다.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아이템처럼 얻어낸 존재가 아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도 당연하게 나의 편이 되어주었던 사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본인이 살기 위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은 아무리 박연진이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교폭"이 특히 더 임팩트가 컸던 이유는 우리가 처음으로 박연진이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박연진은 본인이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강자에게 교태를 부리기는 하지만 절대 움츠러들거나 절박해지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교도소 방 안에서 누군가가 날씨를 물었을 때, 박연진은 직감적으로 본인이 위기 상황에 쳐했음을 인지하게 되고, 강자 앞에 수그리게 된다. 박연진이 날씨를 얘기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본인의 자존심이 완전히 짓밟혔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죽음, 가정의 파탄, 감옥행 이 3가지는 박연진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박연진에게서 엄마라는 가장 견고한 벽을 앗아가고,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음으로써 작가가 정말 디테일하게 박연진에 대한 복수를 설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려 12명의 악인이 존재하는 드라마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동은파 사이에서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따뜻함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대조가 참 좋았다.
홍영애나 정미희와 같이 본인의 이익을 위해 자식을 무참하게 버려버리는 엄마도 있었지만, 강현남과 윤소희의 엄마와 같이 자식을 위해 기꺼이 지옥을 참아내는 엄마도 있었다.
강현남이 선아를 홈스테이 가족에게 보내며 적어낸 편지에서 딸에 대한 마음이 절절히 드러난다.
로라 사모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이 편지와 함께 도착했을 이선아의 엄마입니다. 선아는 박복했던 저한테 하나밖에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많은 거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선아는 알러지도 없고 건강하니 이것저것 다 먹여주세요. 저의 기쁨을 당신께 보내드리니 부디 사랑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특히 마지막 두 문장에서 선아가 비참했던 강현남의 인생에서 얼마나 한 줄기 빛같은 존재였는지, 그리고 홈스테이 가정에서 사랑 받으며 행복하길 바라는 그녀의 진심이 드러나 눈물이 났다.
개인적으로 와닿았던 장면은 문동은이 강현남에게 빨간 립스틱을 선물해주었다는 점이다. 남편에게 하루하루 맞으며 마음 졸이며 살던 강현남은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동은에게 받은 립스틱을 보며 강현남은 작은 설렘을 느끼고, 새로운 출발의 희망을 맛볼 수 있었다. 원래 인생을 살아가는 힘은 이러한 작은 설렘과 위로에서 슬그머니 생겨나는 법이다.
더글로리에는 희생양이 없다. 정말 벌을 받아야 하는 악인들만 벌을 받았다.
유일한 죄 없는 피해자는 하도영과 하예솔 정도였는데, 하도영이 예솔이와 함께 축구의 나라 영국으로 떠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으로 어느정도 closure이 맺어졌다고 생각한다.
복수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문동은파 사람들이 없다는 점도 좋았다.
비록 강현남이 중간에 남편한테 무참히 맞긴 하지만, 그래도 큰 위기 상황 없이 다 원하던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잘 풀렸다.
중간에 잠깐 나온 장면이지만 에덴동산 할머니가 문동은 집을 찾아온 정미희 (문동은 엄마) 를 내쫓을 땐 좀 긴장했었다. 기본적인 상식이라고는 없는 듯한 정미희가 노쇠한 할머니를 폭행하면 어쩌나..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할머니가 빗자루를 좋은 무기(?)로 사용하였고, 문동은의 엄마는 무사히 그곳을 떠났다.
글을 마무리하며,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본 두가지와 옥의 티 한가지를 얘기하고 끝내고자 한다.
강현남의 남편이 죽었을 때, 강현남이 울다가 웃고, 다시 우는 장면이 너무 좋았다. 문동은과 주여정의 슬픔을 관통하는 감정이 분노라면, 강현남의 슬픔은 한이었다.
죽일만큼 증오했던 남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평생 함께 살기를 약속할만큼 한때 사랑했던 사이였다. 남편이 사라져서 드디어 내 인생 살 수 있어 기쁘다가도, 결국 이렇게 자기 무덤을 파고 만 남편이 안타깝다가도, 그런 남편에게 맞으며 십몇년을 산 자기 자신이 한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남편이 죽고 나서의 표정으로 염혜란 배우가 너무 잘 표현하였다고 생각했다.
강연천이 주여정의 아버지를 죽인 이유가 참 현실적이다. 그저 사이코패스라서, 심심해서 따위가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암시만 되어있지만, 하나의 단어로 정의한다면 그건 바로 아들을 끔찍히 아끼는 아빠를 둔 주여정에 대한 질투심일 것이다. 강연천은 분명하게 말한다.
자기는 다 죽어가고 있는데 주여정 아버지는 라면만 먹는 아들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그 아들 자식 얼굴 한번 보고 싶었다고. 아버지를 죽이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실제로 주여정이 나타나 아빠를 울부짖자 강연천은 기괴한 목소리로 아빠, 아빠를 따라한다. 그가 주여정한테 계속 아빠를 죽인 것에 대한 편지를 쓰며 주여정을 자극하는 것도 결국 이 질투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라면을 먹는지, 제대로된 밥 한 끼를 먹는지 걱정하는 아버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단숨에 달려와 "아빠"라고 울부짖을 수 있는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둔 주여정에 대한 질투심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일한 옥의 티가 하나 있다면, 로맨스 신에서의 대사들이 좀 오글거린다는 점이다. 문동은과 주여정이 살아내는 인생의 무게와 맞게 대사를 좀 더 담백하게 표현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문동은과 주여정이 차에서 노래 부르며 서로 장난을 치는 장면은 너무 오글거리고 다른 장면들과 이질적이어서 처음으로 skip 을 눌렀다. 주여정이 문동은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 둘의 관계가 여느 커플과는 달랐던만큼 로맨스의 서사도 조금 특별하고 신선한 방식으로 전개됐으면 좋았을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엔딩 신에서 먹구름이 드리우고 둘이 교도소를 입장할 때 "사랑해요"라고 서로 얘기하고 나란히 입장하는 건 너무 식상하여 아쉬운 점이다. 그저 맞잡은 두 손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각 잡고 리뷰를 쓰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생각할 것이 많은 드라마여서 그랬던 것 같다. 웰메이드 드라마를 보게 해준 모든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특히 12명의 악인 대상 촘촘하고 개연성있는 복수를 설계한 김은숙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엄청 머리 아프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