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했던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미 어른을 훌쩍 넘어 호호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을 거다. 타고나길 단단하지 못하고 여린 심성을 가진 내 마음속은 물음표로 가득 차 있다. 한 번도 확신에 찬 마침표를 찍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오늘 점심 메뉴판 앞에서도 이 결정이 최선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답답해 죽겠다. 파도 위에 떠 있는 카약에 혼자 앉은 듯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내 마음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이 표현이 확실한가, 다른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물음표가 머리에 둥둥 떠다닌다.
확신을 가지기 위해, 중심을 잡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자아를 가지기 위해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찾아봤다. 자아실현에 대한 책도 읽어보고, 마음 힐링 프로그램에도 참가해보았다. 최근 가장 핫한 인싸들의 놀이가 된 MBTI는 고등학교 때부터 5년 간격으로(시간이 지나 내가 바뀌었을 수 있으니) 3번 정도 해보았고, 지성을 넘은 영성을 찾게 된다는 에니어그램은 물론이고 내 얼굴과 이미지에 맞는 컬러는 무엇인지 퍼스널 컬러까지 안팎으로 나를 알 수 있다는 모든 검사를 섭렵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나만의 강점을 찾을 수 있는 강점 검사도 하고 관련 책도 읽었다. 이 정도면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는 강한 멘탈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답은 절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섞여서 나에 대해 섬세하게 알아갈 수는 있었지만 내 인생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는 마음이 참 약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속 위원회는 수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말하면 손가락질받지 않을까?’ ‘이 패션은 좀 더 뚱뚱해 보여서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을까?’ ‘저 사람의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질까?’ 그러면 그 질문에 수없이 많은 ‘내’가 답한다. 결론은 나지 않고 내 마음은 항상 흔들흔들 마지막 잎새처럼 흔들리고 위태로웠다.
작년 가을, 그런 내가 지겨워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 올해 재택근무를 하면서 생긴 여유 시간에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동안 나만 이런 내가 불편하고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던 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를 겹겹이 싸고 있는 포장지를 다 뜯어버려! 곱게 묶인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예쁘게 벗기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뜯어. 그럼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진짜 네가 나올 거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너의 날 것의 모습을 더 좋아할 거야. 상대방의 반응을, 앞에 펼쳐질 상황을 미리 계산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쿡 찌르면 아! 하듯이 자연스럽게 너를 묶은 것을 놔. 눈치 보지 말고 부족하고 못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드러내 봐.” 그렇지. 선물 받으면 최대한 마구 풀어헤쳐야 선물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엇이 들어있을지 몰라 들뜨고 기대하는 모습, 받은 선물을 아끼지 않고 매일 쓰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선물한 사람이 더 기쁘고 보람을 느끼기 마련이다. ‘나’라는 선물은 뭘까, 궁금하니 포장지를 몇 겹이고 다 뜯어내고 속을 보고 싶어 졌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다. 숨쉬기 운동을 그만두고 진짜 운동을 하고 러닝을 한다. 귀찮은 걸 죽도록 싫어하던 내가 집을 뒤집어엎어 방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방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강아지를 키우고 싶었지만 룸메이트의 강력한 반대로 포기했다). 낯선 사람, 어려운 사람과 만나면 언제나 체해서 앓아눕던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같이 처음 해보는 프로젝트를 만들고, 진행하게 되었다. 기획서와 콘티를 쓰고 카메라를 들어 영상을 찍는다. 그리고 이렇게 속으로 감추기만 하던 내 생각과 마음을 글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내 방은 이제 글도 쓰고,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나만의 작업실이 되었다. 내 방에는 작은 정원이 생겼으며, 일하는 시간 외에도 몸을 움직이니 무기력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 낯설고 불편했던 것들도 막상 여러 번 해보니 서툴지만 재미가 있었고,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도 활기도 얻게 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 것이다. 7시에 일어나겠다 마음먹었지만 눈뜨니 10시가 되어 있더라도, 내가 아주 바보 같은 반응을 보여 사람들이 웃음거리로 삼을지라도, 만든 영상이 레트로라 칭할 수도 없을 정도로 촌스러움을 자랑할지라도, 기르던 토마토가 찬 바람이 불자 얼어 죽는다 해도, 내가 쓴 글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해서 친구가 갖다 버리라고 한다 해도 그냥 계속해보는 거다. 그러다 보니 면역력이 생기고, 계획과 계산이 끝나기 전에는 움직이질 못해서 시작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물결 따라 수없이 흔들리고,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잔뜩 물을 먹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파도 위에서 흔들리던 카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카약과 함께 뒤집혀 물에 빠지던 이전의 나는, 카약 위에 올라서서 서핑하듯이 파도를 즐기다가 아하하 웃으면서 물에 빠지는 내가 되었다.
이제 나는 이전보다 열린 마음으로 모나고 부족하고 덜떨어진 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물음표로 끝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고, 사람들의 표정과 한마디 말에도 가슴이 두근두근해진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는 중이지만, 흔들리는 수천 갈래의 마음 조각들 사이에서 내 진짜 민낯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민낯인 척하는 포장된 얼굴이 아닌, 거품이 다 사그라진 아주 보잘것없고 작고 뾰족한 진짜 민낯을.
가수 아이유가 한 방송에서 한참 국민 여동생으로 삼단고음을 하고 인기가 치솟을 때 언제 이 거품이 꺼질까 고민이 됐다고 이야기했다. 거품이 낀 채 멋지게 평생을 조마조마하게 사느니 거품을 아주 밀도 있게 압축시킨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고 조금 덜 멋지지만 마음 편히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앨범 프로듀싱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는 서른이 넘은 지금에서야 내 알맹이를 찾아낼 결심을 하고 첫걸음을 뗀다. 아이유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나는 지금까지 좋고 나쁜 모든 종류의 거품이 낀 채 살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품을 걷어내고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점점 작아졌다. 그래서 이제 내 알맹이를 찾겠다고 결심했는데, 아직도 많이 두렵고 무섭다. 거품을 걷어낸 내 모습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하지만 천 번, 만 번 흔들리면 어떠랴, 나는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련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후회하면서 이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나는 오늘 내 인생에서 가장 젊고 어린 순간을 살고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