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강렬한 이야기들
내 인생 최초의 덕질
잠들기 전 부모님을 쫓아다니며 읽은 책 또 읽고 또 읽어달라고 했던 아기는 조금 빠르게 한글을 뗐다. 부모님이 읽어주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모조리 읽고 싶어서였을까. 우리 집에는 그런 아기를 기특해하고 예뻐해서 뭐든지 해주고 싶은 이모와 외삼촌들이 같이 살았다. 월급날이면 항상 퇴근길에 밖에서 만나 온 가족 외식을 주도했던 이모는 이제 막 한글을 뗀 나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월급날 외식가기 전에 동네 서점을 꼭 들러서 책을 한 권씩 사주겠다고. 그 때부터 나는 이모의 월급날만을 기다리는 어린이가 되었다. 매달 이모의 월급날엔 어김없이 설레서 콩콩 뛰며 동네 서점 앞에서 이모를 만나 혼자서 서점을 빙 돌며 어떤 책을 사야 최고로 신날까 고민을 했다. 엄마는 자꾸 늘어나는 책을 누가 언제 사줬는지 메시지를 남기자는 규칙을 정했고, 내 세상인 책장은 점점 커져만 갔다. 때론 세상에서 최고로 재미있는 책을 고르기도 하고, 가끔은 아까 고민하던 다른 책을 살걸 아쉽기도 하며 책을 고르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그렇게 일곱살 인생 최초로 책 덕질을 시작했다.
알고보니 책 덕후가 아니라 이야기 덕후였어
그렇게 3년 정도 이모와 삼촌, 부모님으로부터 책을 선물받았을 때 즈음 나는 어린이 활자중독자가 되었다. 옛날 이야기부터 위인전, 창작 동화, 시집, 어린이용 세계 문학 전집, 식물 도감, 과학 시리즈, 명심보감같은 동양 고전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읽은 책의 범위가 매우 넓어졌다. 마치 요즘 사람들이 '쇼츠를 정신없이 보다 보니 한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더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때의 나는 책을 정신없이 보다 보니 이만큼 많이 읽었네! 하는 수준이라 덤으로 문해력과 속도를 얻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안에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책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깨닫고, 때론 엄마에게 혼나고 친구와 싸워 속상할 때는 책으로 숨기도 한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을 배우고 현실에서 도피하기에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이야기가 최고다. 그 시절 내가 읽었던 가장 강렬한 이야기는 '80일 간의 세계일주', '몬테크리스토 백작',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같은 이야기들이고 아직도 이 세 권의 책은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다 열 두 살, 사춘기가 시작되고 또래 아이들끼리의 갈등과 뭉침이 첨예해지는 시기에 '해리 포터 시리즈'를 만났다. 그 번쩍번쩍한 섬광과도 같은 첫 만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예 현실과는 동떨어진 마법과도 같은 판타지 세계, 그 안에서 내 또래 해리와 친구들은 우정도, 사랑도, 정의도 배우며 성장한다.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를 살아 숨쉬게 했던 판타지 세계
'해리 포터 시리즈'는 책과 함께 영화로도 나를 사로잡았는데, 상상을 그대로 구현한 것 같은 영화를 보며 영화라는 이야기에도 빠져들게 되었다. 이후로 책, 영화, 공연, 전시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나는 헤매고 다녔다. 친구들과 교환 일기장에 끄적끄적 우리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낄낄 웃으며 쓰기도 하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써서 올리기도 하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며 라디오 작가가 되어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야자 시간이면 라디오를 들으며 현실 세상의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듣거나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의 전문을 찾아 읽고, '향수'같은 현대 소설들, 무림 고수들이 나오는 동양 판타지와 '반지의 제왕'같은 서양 판타지들 읽으면서 그 방대한 세계관을 상상으로 따라가면서 공부해야 하는 현실을 회피하곤 했다.
고3이 되던 날 나는 등굣길에 시속 65km로 달려오던 택시에 치여 2미터를 날아가 떨어졌지만 골절이나 상처도 없이 피멍과 경미한 뇌진탕만 얻었다. 사고 규모에 비해 경미한 부상은 기적이었지만, 그 이후 큰 교통사고 후유증과 오른쪽 폐 70%가 쪼그라들고 갈비뼈를 잘라내며 수술을 해야하는 늑막염을 앓는 절망의 시작이었다. 열아홉과 스물, 모두 설레며 새로운 시작을 하지만 나는 병원에서 매일 의사 선생님이 최악의 경우라고 가정하는 상황을 현실로 맞이하고 있었다. 피부 마취만 하고 갈비뼈 사이에 삽관을 하는 수술 후 트라우마가 남아 눈만 감으면 쫓기다 칼이나 깨진 유리 등 뾰족한 것에 찔리는 꿈에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길고 긴 겨울밤 내내 이대로 죽게 되는 거라면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삶이었을까 생각하는 비극의 한 가운데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였고, '드래곤 길들이기'였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언제나 나처럼 부족하고 약한 주인공들이 기막힌 우연을 여러 번 겪으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대서사시의 주인공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간절히 염원하며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가 나올 때면 여전히 초라하고 작은 내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져 쉽게 마음이 꺾이고 부러졌다. 키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고, 밥도 남들의 절반밖에 먹지 못하고, 에너지를 최대로 끌어다써도 남들의 절반도 되지 않으니 나는 반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평범'한 것과 '남들처럼만'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1인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말일 뿐이라 주눅들고 납작해졌다. 억지로 쓸모있는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밤을 새며 복수전공을 하고,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대외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인턴십을 떠났다. 하지만 미국에서 나는 터닝포인트를 맞았고 더이상 두려운 마음에 가시를 두르지 않고도 전투력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10년 남짓 지나고 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도 세상도 사랑한다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직도 부족하고 약한 부분이 많지만, 아무려면 어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는 성장캐(성장하는 캐릭터)인걸!
세상 모든 바이올렛에게 건네는 찬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을 여기저기 따라가다 보니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책을 읽는 사람들을 만나니 아픈 시간 동안 내가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첫사랑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올 여름, 그 많은 우연들을 거쳐 운명처럼 '포스 윙'을 만나게 되었다. 서평 이벤트를 통해 만났는데 말로만 듣던 벽돌책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책을 펴자마자 이건 당분간 내가 열렬하게 사랑하게 될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너무 방대한 분량에 책을 펴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주인공은 전사들 사이에 핀 코스모스처럼 별난 존재이다. 전쟁은 커녕 드래곤에게 선택받기도 전에 바람에 나부끼며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은 약하고 종이인형같이 팔랑거리는 몸을 가진 책벌레 소녀 바이올렛이다. 바이올렛은 삶의 기반이자 옳은 일을 배운대로 해야한다는 신념을 심어준 자신의 나라이자 가족을 사랑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유별나기 때문에 학우이자 전우가 될 입학 동기들 사이에서 눈총받는 것을 넘어 목숨의 위협을 여러 번 받으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사랑해서는 안되는 반역자의 아들에게 끌리고, 그의 드래곤과 반려인 드래곤의 선택을 받으며 운명처럼 삶이 엮인다. 그리고 차근차근 성장해낸 그녀를 마지막으로 시험한 건 그녀의 신념이 전부 거꾸로 뒤집히는 것. 운명이 이끄는 대로 나풀대며 소용돌이에 휩쓸린 바이올렛은 점차 성장하여 자신의 정체성도 깨닫고,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어진 정의를 마주했을 때 옳은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전쟁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와 경중에 고통하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껍질을 깨고 나오기도 한다.
드래곤과 룬 문자, 흑마법사, 마력이 등장하는 바이올렛의 세계에 푹 빠져들어 읽으며 나 또한 내가 마치 바이올렛이 된 것 같았다. 그녀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나도 느낀 적이 있었고, 함께 좌절하고, 함께 훈련을 하며 조금씩 10대 후반부터 이어 온 성장 과정을 다시 주욱 따라서 현재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책장이 줄어들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이야기도 절정에 이르러 도무지 한 줄 한 줄 읽기가 벅찼다. 바이올렛의 감정이 격앙되는 만큼 내 감정도 격앙되어서 사랑하는 존재들을 잃게 될까봐, 혹은 사랑하는 이들을 남기고 내가 죽게 될까봐.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벽돌책의 후속 벽돌들을 당장 읽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는 것, 그것은 곧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꼬마 이야기덕후가 마음 속에 되살아난 것과 같다는 것을. 어린 바이올렛에게 아버지가 '때가 오면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을 안다'며 옛날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어주고 선물해주었던 장면이 가장 인상깊었다.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해주고 고전이 세대를 넘고 넘어 사랑받는 이유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접한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한 번 뿐인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것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덕후였던 나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강렬한 이야기의 표본은 영웅서사, 혹은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나를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평범하고 나약한 인물이 운명에 휩쓸려 고난을 겪고 종국에는 승리하는 구조이기 때문 아닐까.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고, 발전할 것 같지 않은 일상을 사는 나에게도 이런 운명이 찾아와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길 바라며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모든 바이올렛에게 전한다. 행간에 숨겨진 바이올렛의 모든 순간들을 한 장 한 장 성실히 쌓아나간다면 비로소 거대한 드래곤 위에 올라타서 번개를 악당에게 내리꽂는 순간도 찾아올 거라고. 그러니 때론 떨어지고, 때론 부서지더라도 그 순간이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멈추지만 말자고.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단순하고 뻔한 구조를 가진 가짜 이야기가 각박한 현실을 사는 데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의 악당들은 이야기 속의 악당들보다도 무자비하고 악랄하다. 정의와 사랑과 배려같은 단어들의 무용함을 울부짖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 사람은 아주 커다랗고 깊은 사랑을 오래 받아도 변하지 않기도 하지만, 아주 작은 다정함에도 뿌리채 바뀌기도 한다. 누군가는 현실에서의 악은 이야기 속의 매력적인 악과는 다르게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반전도 다양함도 없지만, 현실에서의 선은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강렬하다고 말한다. 삶이 만드는 하나하나의 작은 기적들은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가 되어 인류를 절벽에서 끌어올린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사람은 사랑을 하고, 세상은 나아간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니 이야기의 힘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랑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