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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현 Dec 06. 2020

이 밤의 끝을 잡고, 땡큐!

목소리로 전해지는 따뜻한 글과 위로-라디오

“이 밤의 끝을 잡고, 땡큐!” 매일 자정, <이민우의 자유선언>의 클로징 멘트를 들어야만 꼭 하루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와 싸운 날에도, 좋아하는 남자애가 알고 보니 내게 고백을 도와주겠다고 친구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에도, 시험을 잘 본 날도, 시험을 망친 날도, 중학교 3학년 난소의 물혹을 제거하기 위해 내 생애 첫 수술을 하고 산부인과 검진을 받으러 가서 괜히 주눅이 들어 울적했던 날도 언제나 함께해준 말.


나의 학창 시절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라디오!”라는 답을 외칠 것이다. 10대의 나는 라디오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도 이미 라디오는 텔레비전, 케이블 방송과 함께 세이클럽, 다음 카페, 각종 커뮤니티가 활발해지면서 오전에 집안일을 해야 하는 가정주부나 택시, 버스 운전기사님들이 들으시는 올드한 이미지였다. 시작은 J였다. J가 나를 라디오 속 신세계로 인도했다.

“얘들아, 너네 밤늦게까지 시험공부할 때 어떻게 해? 내가 진짜 짱인 거 알아냈어! 이거 하나면 새벽 두 시까지는 끄떡없어!” J의 말 한마디에 Y와 I, 나는 당장 달려들었다. 우리는 시험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서 딴짓하거나 꾸벅꾸벅 조는 시간이 절반인 중딩들이었으니까. “너희 정지영의 <스윗 뮤직 박스>라고, 알아? 내가 요새 이거 들으면서 밤에 포토샵도 하고 그러는데 디제이 목소리도 너무 좋고, 좋은 음악이 진짜 많이 나와! 오늘부터 이거 꼭 들어봐.” “그거 몇 시에 시작하는 건데?” “밤 열두 시.” “야, 너무 늦게 시작하는데?” “그러니까 시험기간에 딱이지!”


우리 네 명 중에서도 가장 잠이 많은 나는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잠드는 날이 더 많았고, 용케 열두 시에 깨어있는 날이면 인터넷 바다를 헤엄하느라 바빠 라디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험기간이 되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상에 억지로 앉아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던 그룹 ‘신화’의 멤버가 저녁 열 시에 시작하는 라디오를 진행한다는 정보도 입수해서 10시부터 라디오를 틀어놓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굴이 안 보이는데 대화를 들으려니 어색하고 답답했다. 게다가 내가 라디오를 듣자마자 디제이가 바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까지! 바뀌는 디제이는 같은 그룹의 멤버라고 하니 더 아쉬웠다. 이왕이면 같은 멤버끼리 두 명이 진행하면 계속 들을 텐데… 그래도 열두 시에 <스윗 뮤직 박스>를 들어야 하니 열 시부터 라디오를 틀어놓고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한 달, 두 달, 들으면서 나는 점차 목소리로 전해지는 글의 따뜻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디제이와 청취자들이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연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읽히지 않아 아쉬웠지만, 천방지축 네 친구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에피소드를 사연으로 몇 번 쓰다 보니 드디어 내 사연이 읽히는 날도 왔다. “어? 이거 내 사연인데? 어떡해 너무 좋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발갛게 달아올라서 나는 혼자 발을 동동거리며 사연이 끝날 때까지 숨죽이며 들었다. 그렇다. 그 순간 나는 라디오와 지독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 이후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J와 I가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다행히 Y와는 같은 학교에 배정받았지만 다른 반이었고 등하교 때도 다른 친구들이 함께 어울리게 되어 둘 만의 이야기를 나누기란 쉽지 않았다. 수술 후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수업 후 야자까지 하는 것은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서로 친해지기 전에 공부하느라 친구들은 서로 경쟁하고, 맨날 잠만 자는데 쟤는 왜 모의고사를 잘 보냐며 나를 시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나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사연 그대로만 봐주고 대화를 나눠주는 라디오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다!” 수능을 치면 어느 학교, 어느 과를 가야 할지가 가장 고민인 고등학생에게 확실한 공부의 목표가 생겼다. 그러나 곧 프로그램이 종영하게 되었고, 작가님도 다른 방송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들었다.


이어서 방송하던 프로그램을 들으면서도 나에게 꿈과 위로를 주었던 그 글을 쓰신 작가님을 찾아 그분이 새로 참여하시게 된 방송을 듣게 되었다. 작가님은 라디오 계의 최고로 손꼽히는 프로그램인 <별이 빛나는 밤에>의 메인 작가님이 되셨다. 작가님 덕분에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롱런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뭐가 다른지 잘 듣고 배우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별밤”만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새로 쓰신 작가님의 책이 출간되자 책 증정 이벤트에도 참여했고, 사연을 자주 보냈던 내 이름과 주소도 작가님은 기억하고 계셨다. 이름과 주소를 보고 너무 반가웠다면서 책 앞장에 적어주신 메시지를 닳을 때까지 반복해서 들춰보았다. 그 이후로 작가님의 개인 홈페이지에 ‘고3인데 작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작사를 했고 친구들은 미쳤다고 했다, 저도 꼭 작가님 같은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어서 열심히 글도 써보고 공부하고 있다’고 글도 남겼다. 


작가님은 수능이 끝나고 출간된 책의 출간 기념 파티에 얼굴도 모르는 고등학생인 나를 초대해주셨다. 그 날 우리는 드디어 서로의 글이 아닌 얼굴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유명인들도 많이 참여한 파티에서 같이 간 친구와 함께 연신 감탄만 하다가 홍진경 님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럴 수가! 방송에서만 보던 분을 실제로 보다니!” 호들갑을 떠는 우리에게 홍진경 님은 반갑게 인사해주셨고,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어서 라디오에 사연도 보내고, 작사도 해보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하니 꼭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해주셨다. 그 외에도 뮤지컬 배우 김호영 님, 김원준 님을 보며 인사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좋아하다가 작가님께 인사를 하고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집에 왔다.


비록 그 이후에 재수하게 되면서 작가님의 홈페이지에 아주 가끔씩만 짧은 안부 글을 올리다가 폐에 물이 차고 큰 수술을 하게 되어 내 삶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마음이 버석버석 메마른 채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작가님의 홈페이지 주소도 잊은 데다가 라디오 작가가 아닌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 검색조차 해보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며 용기를 내어 검색해보니 작가님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글로 전하고 계셨다. 이제는 라디오와 함께였던 10대의 기억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함께 라디오를 들었던 친구들과 나는 30대가 되어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예전처럼 온 동네가 떠나가라 수다를 떨지도 않지만 여전히 그때를 추억하며 마음에 간직하고 삶이 퍽퍽해 목이 메일 때면 들춰본다.


“작가님, 작가님과 같은 라디오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조금 늦은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서툴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글로 세상과 소통해 보려고 해요.” 어린 작가 지망생이었던 내게 따뜻하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야기해주고, 꿈을 이룰 수 있게 상담도 해주며 책 출간 기념 파티에 초대해 꿈을 이룬 모습을 보여주시며 동기부여도 해주셨던 작가님께 이렇게 오랜만에 안부 글을 써보려고 한다. 너무 오래전이라 나를 잊으셨을까 걱정도 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교통사고와 여러 번의 수술을 겪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 모습을 사랑했던 첫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많이 부족한 연애를 하며 겪었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전할 수 있을까? 그 이후에 미국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타국에서 일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며, 내 모습을 찾아가는 동안 겪었던 일들과 30이 넘어서야 비로소 마음이 고요해지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그 모든 이야기를 한 번에 전할 수는 없겠지. 대신 글로 내 마음을 읽고, 헤아리며 조용히 그 당시에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주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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