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짓밟는가?
다이애나를 생각하며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친척 결혼식에 갔던 저는 예식장에서 정말 많은 여성들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닮아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스타일은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모습에서 차용한 것이 많았었죠. 그녀는 80년대 스타일의 아이콘이라고 불렸습니다. 언론은 앞다투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방송으로 내보냈으니, 당연히 그녀의 옷차림과 메이크업, 헤어스타일은 세계 여성들이 선망하고 모방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리바이스 청바지를 즐겨 입었고, 디올과 페라가모의 핸드백을 자주 들었으며, 이브닝드레스는 베르사체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인 브루스 올드필드와 캐서린 워커가 디자인한 간결한 드레스도 즐겨 입었습니다.
영화 스펜서 속 샤넬의 드레스
영화 속 대사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옛 궁에 모여 파티를 여는 황실 가족들, 그들과의 보이지 않는 불화는 잔잔하게 가슴을 저미는 긴장감을 만들어냈죠. 다이애나와의 결혼 당시부터, 이미 내연녀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던 찰스 황태자가 내연녀에게 선물한 진주 목걸이를 다이애나에게도 착용할 것을 강요하고, 다이애나는 답답한 마음에 만찬장에서 진주 목걸이를 뜯어 수프에 넣고 마구 먹은 탓에 모든 걸 토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입은 드레스가 포스터에 나오는 그 드레스예요. 샤넬의 1988년 봄/여름 오트쿠튀르 컬렉션에 나온 작품이지요. 제작팀이 1034시간을 들려 재현해낸 것이기도 합니다. 시종일관 뻔뻔스러운 불륜의 주인공인 찰스와, 이를 알고도 묵과하는 여왕, 그저 묵묵한 내조만을 요구하는 영국 황실의 이중의 면모를 서사 속에 어찌나 치밀하게 녹아있던지요. 스펜서를 보면서 가슴을 세차게 내려쳐야 했습니다.
언론과 황실, 죽음의 공모자들
영화 속 다이애나가 두 아들에게 '학교에서 시제에 대해 배웠지? 이곳은 과거밖에 없어. 미래는 어차피 없고 과거와 현재는 동일할 뿐이지'라고 말을 할 때, 가슴 한편이 어찌나 서늘해지던지요. 저는 당시 영국 언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습니다. 특히 다이애나가 황실과 불륜을 둘러싼 추문을 드러내며, 황실에 대한 국민여론이 비등할 때, BBC의 기자 마틴 바시르는 위조서류로 다이애나에게서 인터뷰 승낙을 받아냈지요. 이 인터뷰 후에 다이애나는 이혼합니다. 문제는 이 마틴 바시르란 자입니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탐사보도를 통해 바시르가 위조서류를 이용, 다이애나의 인터뷰 승낙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이후 BBC도 자체 조사에 들어가긴 합니다만 문제없다고 결론지어 버리죠.
위조를 하긴 했지만 쓰진 않았다
이후 바시르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인터뷰하며 승승장구의 길로 들어섰고, 바시르의 혐의를 눈감아준 보도국 간부인 토니 홀은 BBC 사장까지 지냅니다. 바시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단서를 잡고 내부 고발한 디자이너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러나 사장단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던 위슬러를 위조서류와 관련된 얘기를 했다는 명목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결국 밥줄을 끊어놓았습니다. 이후 25년에 걸친 지속적인 재조사 요구에 결국 그들의 더러운 커넥션은 밝혀집니다. 그러나 바시르는 보고서가 출간되기 직전 건강상의 사유를 들어 사표를 냈죠. 물론 경찰 조사가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요. 국영방송 BBC도 이 사건의 여파로 수신료 삭감이라는 대대적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조사에 임하던 바시르의 태도에 화가 났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위조서류를 만들긴 했지만 인터뷰에 쓰진 않았다. 결국 쓰지 않았으니 범죄가 아니다"라고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더군요.
한 인간의 사회적 죽음에는 놀랍게도 항상 언론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론사주와 같은 결을 가진 인물에겐 동일 범죄도 '사면'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반대되는 인물의 경우에는 '어떻게 서든 죽여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 지금 취재 과정의 투명성 따위는 길바닥에 버린 한국의 언론에게 영화 스펜서 속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죽음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