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리뷰 언어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

잊는다는 것,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

by 필름과 펜

영화 시 Poetry (Film#63)

미자 역의 "윤정희"

여주 미자는 단어를 잊어간다.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그녀에게 언어는 점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런 그녀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언어를 잃어가는 사람이 언어로 예술을 창조하려는 것은 미자의 투쟁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뇌와, 기억해야만 하는 양심 사이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세상은 미자에게 잊으라고 말한다. 가해자 학부모들은 돈으로 잊으려 하고, 손자는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미자는 기억한다. 아니, 기억하려고 애쓴다. 죽은 소녀를, 그 고통을, 그 절망을...


알츠하이머는 미자에게서 일상의 단어들을 앗아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상실이 미자를 진짜 언어로 이끈다. "시"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언어로 이끈다.


극 중, 미자와 노인과의 성관계 장면은 많은 이들이 불편해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빼놓고는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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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왜 그 노인에게 몸을 내어주는가? 돈 때문? 아니다. 그녀에게는 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죽은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침해당했다. 미자는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체험'하려 한다. 소녀의 고통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연민을 넘어선 동일화다. 그녀는 소녀가 되려고 한다. 그 고통의 무게를, 모욕의 깊이를, 절망의 끝을 자기 몸으로 느끼려 한다.


늙은 여자의 몸은 이 사회에서 아무 가치도 없다고 여겨진다. 젊은 소녀의 몸은 욕망의 대상이 되어 착취당한다. 미자는 이 두 몸 사이에서, 한 몸이 다른 몸의 고통을 떠안는 방식으로 속죄를 시작한다.


시 강의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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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강의 장면들은 이 영화의 메타적 구조를 드러낸다.


김용탁 시인은 말한다. "시를 쓰려면 잘 봐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보여준다. 잘 본다는 것만으로는 시가 쓰이지 않는다고.


미자는 사과를 본다. 나무를 본다. 꽃을 본다. 하지만 시는 나오지 않는다. 왜? 그녀의 시선이 아직 표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시는 아름다운 것을 보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온다. 살구가 땅에 떨어져 깨어질 때, 생명이 짓밟힐 때, 그 순간의 고통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존재할 때 비로소 시가 가능해진다.


강의실의 다른 수강생들은 시를 취미로 쓴다. 조미혜라는 여성은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시로 만들어 발표한다. 관객들은 웃는다. 그 시가 서툴기 때문에.


하지만 미자는 그 시에서도 무언가를 배운다. 진실하게 쓴다는 것,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언어로 옮긴다는 것을...


하지만 시 강의실은 미자에게 직접적인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대면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가해자들의 식탁, 그리고 침묵의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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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학부모들이 모이는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부분이다. 물리적 폭력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식당에 모여 밥을 먹으며 돈 이야기를 한다. 얼마를 모아서, 어떻게 합의를 보고, 어떻게 조용히 묻을 것인가.


그들은 '문제 협상"을 이야기하지만, 미자는 '소녀'를 생각한다. 그들은 '해결'을 말하지만, 미자는 '고통'을 느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한 아버지의 말이다. "우리 애들도 피해자예요. 한 애가 시작한 건데 우리 애들은 그냥 따라한 거라고요."


이 대사는 섬뜩하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언어의 폭력. 책임을 희석시키고 죄의식을 지우는 집단적 합리화니까 말이다.


미자는 이 장면들을 견딘다. 말없이, 그러나 또렷하게 기억하며. 그 기억들이 쌓여서 결국 시가 된다.


영화 중간, 미자는 죽은 소녀의 엄마를 만나러 간다.


소녀의 엄마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손자를 배신하는 일이다. 동시에 진실을 대면하는 일이다.


미자는 결국 그 집에 간다. 소녀의 방을 본다. 소녀가 썼던 물건들을, 소녀가 좋아했던 것들을. 그리고 그 엄마의 고통을.


이 장면에서 미자는 말이 없다. 그녀는 그저 본다. 이제 그녀는 표면이 아니라 깊이를 본다. 사물이 아니라 영혼을 본다.


그 후, 미자의 얼굴은 달라져 있다.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단단해졌다. 이제 그녀는 시를 쓸 준비가 되었다...


손자를 고발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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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가 손자를 고발했는지는 영화가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형사들이 손자를 데리고 가는 모습은 암시한다. 미자가 선택했다는 것을.


이것은 단순한 신고가 아니다. 이것은 미자에게 자기 삶의 전부를 부정하는 행위다.


그녀는 손자를 키웠다. 딸이 부산으로 일하러 가고, 미자는 혼자 그 아이를 돌봤다. 가난 속에서, 병든 몸으로. 손자는 미자의 삶의 이유였다.


그런 손자를 고발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미자는 그 선택을 한다.


왜? 진실이 사랑보다 중요해서? 아니다. 미자에게 진실과 사랑은 이제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게 아니라 죄와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손자를 진짜로 사랑한다면, 그가 자기 죄를 마주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소녀에 대한 사랑. 만난 적 없는, 이름도 몰랐던 그 소녀에게 미자는 더 많이 동요되고 소녀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 손자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고 절실해진 것이다.


강, 그리고 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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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강으로 시작하고 강으로 끝난다.


소녀의 시신이 떠내려온 강. 미자가 시상을 찾으려 바라보는 강. 그리고 마지막, 소녀가 다시 나타나는 강.


강은 이 영화에서 생과 사의 경계다. 그곳은 끝이자 시작이다. 죽음이자 부활이다.


물은 씻어낸다. 정화한다. 하지만 동시에 물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강물은 소녀의 고통을 기억하고, 가해자들의 죄를 기억하고, 미자의 눈물을 기억한다.


이창동 감독은 강을 롱테이크로 찍는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물만 흐른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강은 그 자리에 있다.


미자도 그렇다. 세상이 잊으려 해도, 사람들이 외면해도, 미자는 그 자리에 서서 기억한다. 강물처럼 끊임없이,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아네스의 노래, 두 목소리가 겹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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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시가 낭송된다. 처음엔 미자의 목소리로, 그러다 어느 순간 소녀의 목소리로.


이 전환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미자가 소녀가 되는 순간. 아니, 미자와 소녀가 하나가 되는 순간!...


"내가 너이고 네가 나"라는 것. 이창동 감독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미자는 소녀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게 아니라, 소녀와 운명을 일치시킨다.


그렇다면 미자는 죽었는가? 소녀처럼 강에 몸을 던졌는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물리적 죽음이 아니다. 미자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죽었다. 이전의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시인으로, 증언자로, 소녀의 목소리로...


마지막 장면, 소녀가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본다. 그 시선은 관객을 향한다. 우리를 본다.


이것은 질문이다.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미자의 편인가, 침묵하는 사람들의 편인가? 기억하는 쪽인가, 잊으려는 쪽인가?


시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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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많은 사람이 나온다. 하지만 시인이 된 사람은 미자뿐이다.


수강생들은 시를 쓰지만, 그것은 취미일 뿐이다. 진짜 삶과 부딪히지 않는다.


미자만이 시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진짜로 느꼈기 때문이다. 소녀의 고통을, 세상의 추함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윤정희 배우는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실제로 치매 초기였다고 한다. 대사를 외우는 게 힘들었고, 촬영장에서 자주 혼란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그 혼란이 오히려 미자라는 캐릭터를 더 진실하게 만들었다. 윤정희는 연기가 아니라 존재했다. 미자로서.


알츠하이머는 기억을 앗아간다. 하지만 윤정희는, 그리고 미자는 그 상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세부적인 것들을 잊어도, 본질은 남는다. 소녀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 시를 완성해야 한다는 것,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


알츠하이머는 미자에게서 말을 빼앗으려 했지만, 미자는 오히려 가장 강력한 언어를 얻었다. 시를.


그리고 윤정희는 이 영화로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이 그녀의 실질적으로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그녀의 삶과 미자의 삶이 겹친다. 둘 다 언어를 잃어가면서 언어를 완성했다. 둘 다 기억을 잃어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했다.


꽃과 살구, 짓밟히는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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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미자는 꽃을 좋아한다. 그녀의 옷에는 항상 꽃무늬가 있고, 모자에는 꽃 장식이 달려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꽃은 순수한 아름다움의 상징이 아니다. 꽃은 짓밟힌다. 땅에 떨어진다. 시든다.


살구도 마찬가지다.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지며 깨어지고 밟힌다. 다음 생을 위해"


이 대사는 소녀의 죽음을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자의 선택을 말한다. 그녀도 스스로 깨어지기로 선택했다. 다음 생을 위해. 죽은 소녀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꽃과 살구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상처 속에 있다. 깨어짐 속에 있다. 희생 속에 있다.


미자는 이제 안다. 아름다움은 고통을 외면하는 데 있지 않다. 고통을 껴안는 데 있다는 것을.


이 영화가 묻는 것


영화 '시'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시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창동 감독은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미자를 보여준다. 그녀의 선택을, 그녀의 시를...


미자는 완벽하지 않다. 그녀는 가난하고, 병들었고, 늙었다. 세상은 그녀를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시 안에서, 죽은 소녀는 다시 살아났다. 목소리를 얻었다. 기억되었다.


이것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것. 침묵당한 자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 잊힌 자를 기억하는 것.


영화 '시'는 이창동 감독의 가장 조용한 영화이자 가장 강렬한 영화다.


139분 내내 소리 지르는 장면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이 울부짖는다.


폭력적인 장면이 없다. 하지만 그 부재가 더 잔인하다.


미자는 한 편의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를 쓰기 위해 자기 삶 전체를 바쳤다.


이것이 예술가의 길이다. 이것이 인간의 길이다.


아름다움은 공짜가 아니다. 진실은 편하지 않다. 시를 쓴다는 것은, 제대로 산다는 것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미자는 시를 썼고 우리는 그 시를 들었다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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