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미화하지 않는 용기
요즘 영화들은 과장을 보태서 히어로를 만든다. 화려한 CG와 감동적인 음악, 그리고 완벽한 주인공. 하지만 '아문센'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 아문센(1872-1928)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내가 본 영웅 영화 중 가장 솔직하고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만을 다룬 투박한 작품이었다.
노골적인 러브씬조차 거의 없다. 애인이 나오는데도 말이다...이것이 이 영화의 특별함이자 동시에 한계다. 자잘한 재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 하지만 그 대신 우리는 '위대함'의 이면을 목격하게 된다.
영화는 독특한 구성으로 시작한다. 노인이 된 로알이 북극에서 실종된 동료를 구하러 비행기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그의 연인 "베스"와, 한때 가장 각별했지만 완전히 틀어진 친형 "레온"이 함께 로알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며 시작된다.
액자식 구성으로 레온이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는 연대별로 전개된다. 이 구조는 마치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영화 전체에 깔아놓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로알을 기다리는 사람들, 로알이 평생 기다렸던 '최초'라는 순간을, 그리고 결국 오지 않은 로알의 귀환을...
어릴 때부터 로알의 목표는 명확했다. "북극점에 최초로 발을 딛는 1인". 하지만 프레더릭 쿡이 먼저 도착했다는 소식에 그는 망연자실한다. 그래서 그는 목표를 바꾼다. 북극이 아닌 남극으로.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는 정말 극지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세계 최초로 정복하기 위한 장소로 그곳이 필요해서 그토록 가려고 한 걸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로알의 행동을 보여줄 뿐이다. 북극을 간다고 속이고 남극으로 방향을 튼 것, 대원들조차 모르게 비밀로 하다가 항해 중간에야 진실을 말한 것. 내겐 그 방식이 아주 정직해 보이지 않았다.
여하튼 영국 탐험가 로버트 스콧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로알은 이기는데, 영화는 이것을 자세하게 조명한다.
"최초"에 목숨을 거는 로알은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경제적 문제로 쓴소리하는 형 레온을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비겁한 사람"으로 본다. 꿈을 위해선 뭐든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형의 현실적 조언은 방해일 뿐이다.
유부녀 "키스"에게 반한 로알은 본인은 파산 직전인데도 그녀에게 집을 선물한다. 그녀는 누구나 아는 부자인데도. 그리고 일을 마칠 때까지 5년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한다. 돈 개념 없고 본인만 생각하는 철부지 같은 모습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조명한다.
결국 다른 여자에게 집까지 줘서 진짜 아무것도 없는 로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약혼녀 베스. 하지만 결혼식도 하기 전 로알은 실종되어 죽는다. 이 부분이 가장 안타까웠다...
영화가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최초"라는 타이틀과 업적을 특별히 많이 이룬 그의 삶은 행복했을까?
완강하고 직설적이며 이기적이면서도 독불장군이었던 로알의 모습은 내 눈엔 외롭게만 보였다. 그는 극지를 정복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정복하지 못했다. 형과는 틀어졌고, 사랑하는 여인들에게는 기다림만을 강요했으며, 동료들에게는 진실을 숨겼다.
북극에서 결국 생을 마친 로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동료를 구하러 가다 죽었다. 평생 자신의 업적을 위해 달려온 그가, 마지막 순간만큼은 타인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 이것이 영화가 남기는 여운이라고나 할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베스의 기다림!
베스는 집도 없고 돈도 없는 로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의 대가는 무엇인가? 끝없는 기다림과 결국 오지 않는 결혼식이었다...
로알은 극지를 정복했지만, 정작 관계에서는 무능했다. 그는 사랑하는 법을 몰랐고, 기다림을 강요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영화는 이런 일방적 관계의 불균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특히 영화 말미, 베스가 로알을 기다리는 장면은 묵묵하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알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기다린다.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막연함일까...
영화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로알 아문센의 성공 뒤에는 로버트 스콧의 비극이 있다. 스콧과 그의 대원들은 아문센보다 한 달 늦게 남극점에 도착했고, 돌아오는 길에 전원 사망했다.
역사는 승자를 기록한다. 하지만 그 기록이 과연 공정한가? 아문센의 방법이 더 효율적이었다는 것지만, 더 윤리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는 이를 은근히 암시한다.
로알이 대원들을 속이고, 경쟁자를 의식하며, 오직 '먼저 도착하기'에만 집중했던 모습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제국주의 시대 탐험 경쟁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국가의 위신을 걸고 벌어진 이 경주에서 인간성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 영화가 탐구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성공의 대가'다. 로알 아문센은 분명 성공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은 것들은?
형제애, 사랑, 안정, 그리고 평범한 행복. 영화는 묻는다. 이것들을 희생할 만큼 그 성공은 가치 있었는가?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이에 대해서도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이다. 로알을 비난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한 선택과 그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이 영화가 제작된 배경에는 노르웨이 사회의 자성적 태도가 있다. 로알 아문센은 노르웨이의 국민 영웅이다. 하지만 근래 노르웨이에서는 그의 방법론과 인간적 결함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에스펜 잔드베르크"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영웅을 신화화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문센을 완벽한 영웅으로 그리는 대신, 결함 있는 인간으로 그리길 원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러브씬도, 과장된 드라마도 배제한 이유다.
또한 실제 로알 아문센의 마지막은 영화에서처럼 동료 구조 임무 중 일어났다. 1928년, 그는 이탈리아 탐험가 움베르토 노빌레를 구하기 위해 북극으로 향했다가 실종되었다. 그의 유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평생 극지를 탐험한 그가 극지에 묻힌 것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남극 정복', '북극 정복'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 단어가 낯설게 느껴진다. 정복? 과연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가?
로알은 극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복했는가? 영화는 끊임없이 광활한 빙원을 보여준다. 인간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자연 앞에서 인간의 야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아이러니하게도 로알은 결국 자연에게 삼켜졌다. 그가 평생 '정복'하려 했던 그 극지에. 이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정복'이라는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자연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초 탐험가들의 태도는 제국주의적 자연관의 연장선이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깃발을 꽂고, 소유를 주장하는 것. 영화는 이런 시대적 한계를 은연중에 비판한다.
로알은 전형적인 20세기 초 남성상 그 자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며,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강한 남성성'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로알은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형에게 미안하다 말하지 못한다. 대원들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못한다. 이 모든 '못함'은 결국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영화 내내 로알은 거의 웃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해도,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있어도. 그의 얼굴은 늘 굳어있다. 마치 감정이라는 게 약점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은 단지 로알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한 시대가 남성에게 강요한 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차분하다 못해 살짝 지루하다. 화려한 액션도, 감동적인 음악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투박함이 이 영화의 힘이다.
요즘 시대에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용기다. 관객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생각하게 만들고, 영웅을 찬양하기보다는 인간을 들여다보게 한다.
자세한 설명 없이 전개되는 서사 때문에 아문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보면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의도된 선택처럼 보인다. 관객에게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대신, 스스로 찾아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영화의 액자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레온과 베스의 대화다. 로알 때문에 상처받은 두 사람. 형은 동생의 무책임함에, 연인은 그의 부재에...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둘은 로알을 기다리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로알이 왜 그랬는지를. 그가 왜 다르게 살 수 없었는지를. 이것은 일종의 화해다. 당사자가 부재한 채로 이루어지는!...
어쩌면 이것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또 다른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로알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도 어쩌면 로알처럼 무언가의 '최초'나 '1등'에 집착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과정에서 정작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문센'은 완벽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정직한 영화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오래 남는다. 화려한 히어로 영화에 지쳤다면, 인간의 민낯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 투박한 영화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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