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트완에서 트뤼포로, 다시 트뤼포에서 누벨바그로
'신파(新派)'는 언제부터인가 영화를 찾는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관객들이 떠올리는 신파라는 단어에는 항상 억지, 눈물 등의 연관어들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보통 흥행의 측면에서 소위 말하는 '대박 영화'를 가늠하는 기준은 관객 1,000만 명이 되곤 한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관람한 국내 영화 중 위와 같은 신파의 코드에서 자유로운 영화는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좀 본다' 하는 관객들 사이에선 '대기업 영화=상업 영화=신파 영화'의 식이 성립하며, 이는 곧 영화의 내러티브와 무관한 지점에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영화 <극한직업>이 기이할 정도의 폭발적인 흥행을 이뤄낸 것도 위와 같은 바탕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신파의 어원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뜻과 사뭇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파의 개념은 처음 일본에서 비롯되었다. 신파란 일본의 전통 연극(구파)으로 구분되었던 '가부키'와 구분을 두는 의미에서 발생한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초기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강한 연극이었으나 종전의 배경에서 점차 그러한 색은 줄어들었고 대신 사랑이나 비극 등을 다루는 연극을 상징하는 뜻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본래의 신파극 개념이 희미해진 이후에도 그 영향들이 남아 후세의 드라마나 영화 등에 쓰이게 되었고 오랜 시간을 거쳐 지금의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들어봤을 법한 新派, New wave, Nouvelle Vague는 사실 다 같은 맥락의 의미이다. 세 가지 단어 모두 기존의 시스템에 대항하여 문화적으로 새로운 바람이 이는 것을 칭하는 말이었다.
다만 이것이 연극에서는 일본의 新派였고 음악에서는 미국의 New wave였으며 영화에서는 프랑스의 Nouvelle Vague였다.
'제7의 예술'이라 불리는 영화는 프랑스에 위치했던 르 그랑 카페의 인디언 살롱에서 태동했다. 영화를 탄생시킨 국가답게 프랑스는 영화사에서(특히 비평의 측면에서) 많은 움직임들을 만들어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운동이 불어로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이다.
누벨바그의 정신적 아버지라 불리는 앙드레 바쟁은 프랑스의 젊은 비평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는 곧 기존의 관습적인 영화 시스템을 거부하려는 움직임들로 이어졌다. 바쟁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감독이 생산은 하되 창작은 하지 못하는 영화, 스튜디오 촬영 중심의 영화 등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 보다 더 새로운 촬영 방식과 영화적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등으로 대표되는 누벨바그 작가(감독)들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새로운 구조(내러티브)와 형식(카메라의 움직임)을 활용했고 이는 곧 누벨바그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영화를 온전한 감독의 영역으로 들여놓는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를 탄생시켰다.
<400번의 구타>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와 함께 누벨바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 꼽힌다(물론 이밖에도 여러 대표작들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가 그토록 누벨바그 영화에서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정신이 작가주의라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트뤼포는 본인이 성장해온 발자취를 14세 소년 앙트완 드와넬(장 피에르 레오)에게 그대로 투영시켜 스크린으로 옮겨냈다. 당대의 영화들에서 보기 어려웠던 참신한 촬영 기법과 함께 감독의 이야기를 녹여낸 이 작가주의 영화의 탄생은 누벨바그를 세상에 알렸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 <400번의 구타>는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 격인 작품이 되었고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수상하며 작품 내외적인 성취를 모두 이뤘다.
<400번의 구타>의 원제는 'Les Quatre cents coups'이며 영미권에서는 'The 400 blows'로 해석되었다.
국내에서는 영미권의 제목을 직역하는 바람에 원제의 뜻을 담아내지 못했지만 불어로 쓰여있는 원래 제목은 "많은 일들을 겪다, 고된 삶을 살다" 정도의 뜻을 의미한다(해석에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이렇게 트뤼포는 영화의 제목을 통해 본인의 학창 시절 혹은 성장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 본인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이기에 극 중에서 앙트완이 행하는 행동,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트뤼포 자신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영화 내에서 엄마는 앙트완에게 '아빠는 그저 성(last name)을 준 사람'이라고 거듭 언급하는데 이 장면은 트뤼포가 가정에서 부모에게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 채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영화 내에서 앙트완은 장난기 넘치는 행동을 일삼지만 정작 그가 진심으로 즐거워하거나 웃는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그런 앙트완이 활짝 웃는 두 장면이 있는데 두 장면 모두 영화와 관련되어있는 장면들이다. 한 번은 가족들과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차 안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친구인 르네와 함께 영화를 직접 체험하는 듯한 놀이기구를 즐기는 곳에서다.
이 장면들은 영화 자체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감독이자 비평가였던 트뤼포가 학창 시절의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감사편지와도 같은 장면이다.
결국 우리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불우했던 학창 시절을 보낸 소년도, 냉담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던 소년도 그리고 영화를 좋아했던 소년도 모두 트뤼포 자신이었다.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은 두 가지 큰 축으로 비교했을 때 통제와 억압의 공간인 교실과 집, 자유의 공간인 거리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청소년기엔 교실과 집이 안전을, 거리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이지만 <400번의 구타>에서는 각 공간이 정반대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부모님은 가정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어른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를 세상 밖으로 내모는 곳에 항상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존재한다.
학교에서의 어른은 아이들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가정에서의 어른은 시종일관 냉정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앙트완은 오히려 감시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영화 초반 앙트완이 화장대에 앉아 장난을 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앙트완의 모습은 3개의 거울을 통해 비치는데 이 장면은 가족 구성원이 3명이라는 시각적인 비유이기도 하며, 동시에 앙트완이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앙트완은 '글'과 관련된 결정적인 사건들(결석 사유서에 엄마가 죽었다고 쓰거나 작문 시험과 관련이 있는 작가 발자크를 추모하는 과정에서 불을 내는 사건)로 인하여 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모두 아이를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교실과 집에서 벌어진다.
반면 거리에 나와있는 아이들은 시종일관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체육 선생님과 함께 거리를 뛰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순차적으로 하나둘씩 대열에서 이탈한다(이는 직선적인 교육시스템을 조롱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앙트완이 친구인 르네와 함께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 등은 하이앵글, 트래킹 등의 움직임을 통해 한정된 공간이었던 집이나 교실에 비해 보다 더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앙트완이 가출하고 난 뒤 찾은 곳은 억압의 공간인 실내가 아닌 자유로이 배회할 수 있는 거리였다.
영화는 통제와 억압을 상징하는 공간인 교실과 집 그리고 자유를 상징하는 공간인 거리의 대비를 통해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명확하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앙트완은 바다에 도착한다(바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트래킹과 패닝 기술은 당시에 도전적이고 새로운 시도였다). 바다에 도착한 앙트완은 엄격하고 권위적인 부모를 상징하는 듯한 모래 위로 선명하게 난 두 개의 긴 발자국을 뛰어넘어 물속으로 달려든다.
그러나 한 번의 파도가 그의 발목을 덮치자 이후 어떠한 움직임도 가져가지 못하며 바다 밖으로 나오고 씁쓸한, 어찌 보면 무기력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앙트완이 이후에 자유를 찾았을지 아니라면 다시 잡혀서 감화소에 들어갔을지는 오직 트뤼포만이 알고 있다(또한 이런 결말은 당시 누벨바그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열린 서사의 일환이기도 하다).
가능성이 열려있기에 모호한 결말과 달리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트뤼포가 '좋은'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도전정신을 통해 누벨바그 혹은 작가주의 영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측면에서 생각했을 때 오늘날의 한국영화들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왜일까.
우리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컫는 2000년대 초반, 더욱 명확하게는 2003년에 충무로에는 한국형 작가주의 영화라고 불릴만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업영화라는 틀에 본인을 전부 타협시키지 않고 감독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담아냈으며 이러한 영화들 중 몇몇 작품은 비평과 흥행의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의 그 자양분들은 한국 영화계에 깊이 뿌리내려 이후에 나온 수많은 영화들의 밑거름이 되어줬다.
그러나 15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한국영화에 더 이상 그런 움직임이나 도전정신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최대 다수의 관객을 최대로 만족시킬 수 있는 틀을 가진 상업영화만이 쏟아져 나올 뿐이다.
영화 역시 시장 예술이고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기에 관객이 외면하는 영화는 가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영화보다는 '성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치에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한 명의 관객 혹은 작가로서 왠지 모르게 60년 전의 '좋은' 영화를 위해 도전했던 움직임들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