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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lmbug Jul 18. 2019

<로마>

- 관망하는 카메라를 통해 개인의 경험을 관객의 체험으로 이양시키다

출처 - Daum 영화

감상 대신 체험해야 하는 영화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세계를 해부했을 때 우리는 몇 가지 공통분모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서있는 캐릭터가 “여성”이라는 점과 롱테이크로 대변되는 화려한 카메라 워크를 통해 화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드라지는 특징들은 이미 감독의 전작인 <그래비티>나 <칠드런 오브 맨>을 통해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로마> 역시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라는 여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패닝, 트래킹, 롱테이크 등의 다양한 카메라 워크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몇 개의 지엽적인 쇼트 분석들을 통해 미시적으로 다가가려고 한다면 본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곳에 대척점에 서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가 본 영화의 개별 쇼트들이나 상징, 은유 등이 정교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는 관객을 영화관의 좌석에서 1970년대의 멕시코로 옮겨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알폰소 쿠아론이 카메라로 구현해낸 스크린 위의 이미지들은 생산의 개념보다는 재생산의 개념에 가까운 산출물이다. 따라서 클레오의 움직임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한 개인을 바라보는 것보다 영화 내의 거대한 역사 속에 놓인 한 여성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그 시절을 체험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뛰어난 색감과 동화적인 연출 등으로 관객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은 영화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관객은 많지 않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작품의 기저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어제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즉, 화려한 색감이나 유희적 인물들을 따라가며 감상하는 것보다 그 당시 동유럽 정서에 기반이 되었던 ‘상실’이라는 감각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미장센적인 측면에서 <로마>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양 극단에 서있는 영화처럼 인식되지만 감독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한 시대의 향수를, 일련의 체험을 선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 한다.     


정적인 카메라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방식


<로마>에서의 카메라는 알폰소 쿠아론의 유년시절을 투과시키는 매개체이다. 따라서 카메라는 전지적으로 움직이기보다 고정된 위치에서 화면을 관망한다. 예컨대, 카메라는 클레오가 소피아의 집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을, 집의 내부에서 외부로 아이들을 호출하러 가는 뒷모습을 따라가지 않는다. 제자리에 고정된 채로 패닝을 통해 창문을 투과하여 응시할 뿐이다. 

출처 - Daum 영화

카메라는 움직이지만 대상을 포착하지 않는다. 설령 인물의 신체 중 일부가 프레임 밖으로 밀려났더라도 구태여 그것을 담아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로마>에서의 카메라 운동은 동적(動的)이기보다는 정적(靜的)에 가깝다. 카메라는 횡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패닝이나 종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틸트 업(다운)에서 등속 운동을 한다. 등속은 ‘일정함’이고 이는 속도가 변주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화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인위적인 움직임을 더하는 대신 한 걸음 떨어진 채 객관적으로 조명하겠다는 무언의 주장이기도 하다. 

출처 - IMDb

<칠드런 오브 맨>과 <로마>에서의 롱테이크 장면을 비교해보면 이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알폰소 쿠아론이 롱테이크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은 ‘생동감’이다. 총성이 난무하고 자동차는 질주하며 카메라는 흔들린다. 이 시퀀스는 핸드헬드 기법을 통해 생동감을 전달하고 관객들을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인다. 반면 <로마>에서 롱테이크로 담아낸 총격전은 긴박하지 않되 사실적이다. 카메라는 등속의 패닝을 통해 그 상황을 조망할 뿐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영화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입체감을 어떻게 부여했을까. 정답은 층위(레이어)다. <로마>의 모든 쇼트에는 중첩된 이미지와 사운드가 있다. 그렇다면 단순한 평면의 공간에 어떻게 층위를 쌓아 올리고 조화시켰을까. 가령 약 5분가량의 오프닝 시퀀스는 단순하게 클레오가 청소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장면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지된 프레임 밖에서 운동하고 있는 빗자루와 그 위에 겹쳐진 개소리와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각적으로는 비어있지만 청각적으로는 층위가 쌓여있는 장면이다(이밖에도 집 내부를 보여주는 거의 모든 쇼트에는 벌레소리 나 개소리가 포함되어있다). 

출처 - IMDb

영화의 중반부, 산불을 진압하는 장면에서 탈을 쓴 남자가 화면의 전경으로 나타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입체감 구성 방식을 한눈에 전달한다. <로마>는 시각적으로 또는 청각적으로 항상 전경과 후경을 형성시킨다. 

출처 - IMDb

클레오와 아델라가 식당으로 이동하는 단순한 시퀀스에는 자동차 소리, 발자국 소리, 웃음소리, 길거리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소리가 담겨있다. 또한 달리고 있는 클레오와 아델라 뒤로 즐비한 건물들과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은 평면적인 화면에 전경과 후경을 형성해 다층의 입체감을 부여한 좋은 사례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를 연출하는 데 있어 크리스토퍼 놀란과 대척점에 있는 감독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CG 같은 장면을 아날로그로 연출한다면, 알폰소 쿠아론은 아날로그 같은 장면을 CG로 연출하는 감독이다. <로마>에서 보여주는 다층의 시청각적 구조들은 모두 고도로 설계된 건물과 같다. 이렇게 <로마>는 최소한의 카메라 움직임 위에서도 최대한의 입체감을 구현하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관 밖에서 탄생한 가장 완벽한 영화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인 경험을 스크린으로 옮긴 사실주의적 영화이다. 감독이 본인의 유년시절을 자전적 영화로 옮긴 사례는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고전 작품 중에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가 있으며, 비교적 최근 작품 중에는 카를라 시몬의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 있다. 그러나 <로마>가 여타 감독 자전적인 작품들과 같은 범주로 묶이지 않는 것은 이 자전적 영화의 주체가 감독 본인이 아닌 그가 바라본 한 여성이며, 이 영화는 곧 그 여성에게 보내는 헌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폰소 쿠아론은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가장 완벽하게 영화적으로 구현해냈다.

      

출처 - IMDb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완벽한 영화는 영화관 밖에서 탄생된 영화이다. <로마>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칸 영화제는 넷플릭스 제작 영화들을 경쟁 부문에서 배척하고 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는 넷플릭스 영화를 ‘TV용 영화’로 치부하기도 한다. 베니스 영화제나 오스카 시상식의 경우 넷플릭스 영화들을 별도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 사이에서도 ‘진짜’ 영화에 대한 식별이 모호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넷플릭스에서 제작되었기에 진정한 영화가 아닌 것일까. 현대 영화계에선 잘 쓰이지 않는 개념이지만 로마는 아마도 그해 개봉된 영화들 중 ‘작가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영화일 것이다.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되는 절대다수의 영화들은 감독에게 최종 편집권이 없다. 물론 감독에게 전권이 없다고 해서 그 영화가 영화 본질의 기능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란 모든 부분의 최종단계에 감독이 존재할 때 진정한 하나의 창작물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알폰소 쿠아론은 유년기에 본인이 경험했던 시각적, 청각적 때로는 공감각적인 느낌들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구현시켰다. 그리고 지극히 사적이었던 개인의 경험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의 체험으로 이양되었다. 한 개체의 경험이 개별의 집단들로 전이된 것이다.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힘이며 <로마>는 그 힘을 가장 세련되고 정교하게 조각해서 만든 완벽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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