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39.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1.
물론 완성도 높게 잘 빠진 영화들이 가장 좋기야 하겠지만 모든 영화들이 완벽하게 완성된 상태로 관객들을 만나진 못한다. 영화 현장에 대해 능통하게 아는 사람은 아닌지라 명확히 딱 짚어 얘기는 못하겠다만, 여러 영화들을 보며 추측건대 완성도의 수준과 쏟아부은 돈은 의외로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돈을 많이 들인 영화들이 잘 만들어질 확률이 높기야 하겠지만, 오히려 부족한 제작비가 제작진들의 창의력을 (반강제적으로) 키워주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말이다.
2.
적은 제작비를 커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중 가장 매력적인 방법은 '뻔뻔해지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뻔뻔한 영화가 좋다. 그런 영화들이 있다. '내가 이렇다는데 너희들이 뭐 어쩔 건데?'라며 배 째라는 듯이 당당하게 밀고 들어오는 영화 말이다. 본인 스스로가 당당함을 넘어 뻔뻔하게 들이밀면 '어, 맞아, 그렇지'라고 급하게 수긍하며 관람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기세에 눌린 것이다.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가 대표적인 경우다. 모르긴 몰라도 모든 현장 스태프들이 모여 '뻔뻔하자!' 삼창 외치는 것이 그날 촬영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3.
영화 <다찌마와 리>는 소위 '김치 웨스턴' 혹은 '만주 웨스턴'이라고 불리는 한국식 웨스턴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정확히 말하면 삭막한 모래바람에 반한 것도, 땀을 쥐는 총질에 홀린 것도, 황무지를 뚫고 달리는 기차에 마음을 뺏긴 것도 아니다. <다찌마와 리>의 가장 큰 매력은 누가 봐도 한강 다리 밑임에도 '아닌데, 여기 압록강인데'라며 얼굴색 하나 안 바꾸는 뻔뻔함이다. 이렇게까지 밀고 나가면 사실, 속인 사람 잘못이 아니라 안 속아주는 사람이 문제다.
4.
영화 <불청객>은 한번 더 나아간다. 제작비라고는 자취방 월세(실제로 대학생 자취방쯤으로 보이는, 방 하나 딸린 좁은 집 안에서 대부분 사건이 벌어진다.) 외에는 딱히 들였을 것 같지 않은 이 영화는 <다찌마와 리>와 같이 뻔뻔함이 키 포인트지만 그 노선은 약간 다르다. <다찌마와 리>의 경우, 그들이 설정한 코미디 요소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수행해 내고 거기서 발생하는 균열에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다찌마와 리> 속 인물들이 촌스러운 대사, 과잉된 목소리 톤과 호흡을 후시녹음에 담아 과거 연기법을 따라 하고, 빤히 보이는 타 영화의 설정들을 떼다 붙여놓으며, 미리 짜놓은 합을 능숙하게 수행하여 웃음을 불어넣는 것은 철저하게 의도된 뻔뻔함이다.
하지만 <불청객>은 정반대다. 그들은 진지하게 영화를 수행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수행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의 어색한 연기는 진짜로 연기를 못하는 것이며, 그래픽이 조악한 것도 실제로 CG 입힐 돈이 없었던 것이고, 황당한 설정 또한 그냥 그렇게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이 아무렇지 않은 듯 끝까지 진지하게 밀어붙인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영화 시작과 동시에 여러 방면에서 어색함을 느꼈을 관객들 또한 점차 극에 몰입하게 된다. 영화는 웃음을 바라지 않으며, 관객 또한 자신과 같이 끝까지 진지하기를 바란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B급이 되고자 하는 A급과 A급이 되고자 하는 B급의 차이쯤으로 볼 수 있다. 그게 어느 쪽이든. 뻔뻔하려면 이렇게 끝까지 뻔뻔해야 한다.
5.
소위 '쌈마이'이라 불리는 감성이 있다. <다찌마와 리>와 <불청객>은 그 쌈마이 감성 하면 곧바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들이다. 내가 못 찾는 것인지 아쉽게도 요즘 그런 날 것의 쌈마이 감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개봉한 영화 <킬링 로맨스>나 <핸섬 가이즈> 또한 재밌게 본 것은 맞지만, 날 것의 맛을 느끼기에는 너무 잘 닦여있는 영화로 느껴졌다. 앞서 말했듯, 물론 완성도 높게 잘 빠진 영화들이 가장 좋기야 하다. 하지만 그런 영화가 '쌈마이' 감성을 어떻게 충족시켜 주겠는가. 뻔뻔하게 나를 속여주는, 그런 고약한 영화들이 가끔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