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38. 영화 <트랩>
※ 스포일러 주의
1.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딸을 위한 선물로 콘서트에 딸을 데려간 쿠퍼. 평소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많은 경찰과 특수대원들이 눈에 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쿠퍼는 한 직원을 잘 구슬려 콘서트장이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한 함정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일명 '도살자'라 불리는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바로 쿠퍼라는 사실이다. 이제 쿠퍼는 경기장을 가득 채운 경찰들을 따돌리고 딸과 함께 콘서트장을 탈출해야 한다.
2.
'콘서트장 자체가 살인마를 잡기 위한 함정'이라는 소재 자체는 흥미롭다. 실제 사건에서 소재를 따왔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몇몇 차이야 물론 있겠지만 실제로 이와 유사한 작전이 펼쳐졌다는 것이 꽤 놀라웠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 흥미로운 소재를 요리하는 솜씨다. 흥미를 유발하는 신선한 소재와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만으로도 영화에 몰입하기 이미 충분한 상황임에도 불만족스러운 많은 지점들이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샤말란 감독의 전작에서 보여줬던 내용들을 끌어온다. 한 명을 희생해 여럿을 살릴 것이냐, 한 명의 희생일 피해 혹시나 있을 더 큰 피해를 놔둘 것이냐에 대한 일종의 트롤리 딜레마는 바로 직전 작품인 영화 <똑똑똑>의 가장 큰 중심소재다. 영화 <트랩> 또한 '한 명을 죽게 두고 범인을 잡을 것이냐,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을 살게 둘 것이냐'를 통해 (전편보다는 작은) 트롤리 딜레마를 보여준다. 친절한 아버지이자 소방관, 동시에 사이코 살인마인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분리하여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다중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던 <23 아이덴티티>가 떠오르기도 한다.
문제는, 이미 한번 다룬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다루는 솜씨가 그다지 수려하지 않다. 충분히 심리적 압박이나 서스펜스를 형성시킬 수 있었음에도 엉성한 연출로 기회를 날린다. 전작 <똑똑똑>이 다소 고루하긴 했어도 기본적인 재미는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3.
서스펜스를 형성할 기회를 날려버린다는 것은 스릴러를 표방한 영화인 이상 가장 큰 문제일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긴장감을 느껴야 할 장면에서 컷사이 틈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관객이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분석이 머릿속에서 모두 마무리된 이후가 되어서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잦다. 대표적인 예가 카놀라유 몇 병을 튀김기에 넣어 직원에게 화상을 입히는 장면이다. 튀김기 속에 들어있는 카놀라유 병을 보여주는 컷도, 그것을 빤히 바라보는 직원을 비추는 컷도 너무 길다. 각 컷들을 몇 초만이라도 더 줄였더라면 그 순간 느꼈을 긴장감이, 하다못해 한 순간의 놀람이라도 더 커졌을 것이다. 관객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장면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4.
영화는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위태하게나마 유지하고 있던 긴장감들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이때부터 심각하게 길을 잃기 시작한다. 특히 영화 말미 반쯤 농담 삼아 '이 차에서 또 탈출한다고 나오면 나 진짜 샤말란 영화 안 봐'라고 나 홀로 다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전거 스포크를 구부리며 웃는 조쉬 하트넷을 보며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끈질기고 가둘 수 없는 인물이라는 설정을 준다고 그 인물의 악함이 강함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다. 제목 자체부터가 <트랩>이니, 차라리 영화 마지막까지 함정에 갇힌 주인공의 모습을 더 보여주는 것이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끊어야 할 때를 놓쳐 계속하여 이야기를 늘려뜨린다. 이는 단순히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5.
실제로 이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닥친 상황을 모면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당연히 설정상 본인의 기지나 센스를 발 위하여 탈출하는 것이겠지만, 영화 속 화면을 보면 너무 모든 내용들이 그저 주인공의 탈출을 돕기 위하여 짜 맞춰져 있다. 물론 주인공의 기지를 발휘한 것으로 묘사되긴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기지보다는 지나치게 남발한 우연성에 기댄 것이라고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영화를 비판하는 흔한 이야기처럼 개연성이 부족하다.
몇몇 영화들에서 SNS를 만능열쇠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 이런 방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현실에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영화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득력을 키워내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몇몇 인물들의 입을 빌려 영화의 설정을 모조리 설명해 놓는 모습까지 보면 문제를 풀어놓거나 해결하는 방식이 다소 안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샤말란 감독은 편차가 심한 감독이다. 초반 몇몇 연출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이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 물론 흥행면에서 어떻게든 본전 치기는 꾸준히 하며, 그런 면에서 상업 영화에 있어 나쁜 감독이라 딱 잡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과연 언제까지 기대하고 언제까지 속아볼지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하게 만든다. 어쩌면 맺고 끊지 못한 이번 영화처럼 나 또한 이 감독에 대한 기대를 맺고 끊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