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52. 영화 <하얼빈>
1.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중근 의사를 알고 있다. 그의 모든 행적을 하나하나 알지는 못하더라도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하얼빈 의거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하얼빈>은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하얼빈 의거를 다루고 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것도 모든 사람이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이야기 하나만으로 극을 끌고 가기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우스갯소리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이미 스포일러를 당한 상태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결말까지 내닫는 과정을 타 영화보다 중점적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으며 관객들 또한 그 과정을 조금 더 면밀하게 살피게 된다. <하얼빈>은 그 과정을 꽤 흥미롭게 꾸민다.
2.
감상 후 <하얼빈>만 놓고 평가하기 전에 타 영화와 견주어 비교해 본 관객이 많았을 것이다. 하얼빈 의거를 다뤘던 영화 <영웅>이 개봉한 게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영화는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전반적인 노선은 영 다르다. <영웅>의 경우 애초에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영화기 때문에 가슴을 울리는 넘버들이 반복되고, 이 장르적 특징을 살려 감정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감화시킨다. 하지만 <하얼빈>은 반대다. 물론 감정적 호소가 없진 않지만 <영웅> 보다 낮은 톤으로 진행되며 감정적인 고저를 크게 증폭시키지 않고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보는 사람 취향에 따라 갈릴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하얼빈> 쪽이 훨씬 더 취향에 맞고, 영화 자체만 놓고 봤을 때도 <하얼빈> 쪽이 더 짜임새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영웅>은 소재의 유사함이었다면 형태의 유사함으로 영화 <암살>이 떠오른다. <하얼빈>과 <암살>, 두 영화 모두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여러 인물들이 거사를 치르는 하나의 미션으로 의기투합한다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암살>은 이 형태에 오락성을 크게 가미하여 케이퍼 무비로 잘 버무려낸다. 반대로 <하얼빈>은 오락적인 면모를 줄이고 드라마적인 면을 부각한다. 여기에 첩보 형식을 가져와 에스피오나지 장르로 넘어간다. 감정적 호소를 줄이는 노선을 생각해 봤을 때, 현명한 선택이라 본다. 사실 이 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비교해 볼 수 있는 작품은 영화 <밀정>으로 여러 방면에서 비슷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역사 영화에 감정적 호소를 줄이는 것은 꽤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아무래도 한국인이라면 반응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소재이기 때문에 감정에 기대는 것은 가장 안전한 길이다. 일제강점기 배경의 수많은 영화들이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방식이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진부함과 피로감을 느낄 확률이 높다. 이런 호소를 줄이면 한 순간 관객들에 대한 어필은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인해 영화가 뻗어나갈 수 있는 선택지는 훨씬 넓어진다. 극 초반에 나오는 전투 시퀀스 또한 단순히 관객들에게 시각적 쾌감을 안겨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전투의 참혹함을 보다 현실적으로 담고자 한 모습이 있어 좋다.
4.
대사가 꽤 단조로운 편이다. 대사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각본 자체가 허술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번 영화는 우리가 흔히 위인이라 부르는 인물의 영웅적 면모보다 내적 갈등과 같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고자 한 장면들이 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각본이 허술하고 대사가 단조롭다 보니 그 인간적인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자 한 의도가 죽고 각 캐릭터들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하는 경우까지 보인다. 게다가 많은 한국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단점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오히려 대사가 단조롭기 때문에 잘 안 들려도 대충 유추가 가능하다는, 단점으로 단점을 승화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5.
아무래도 화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 홍보에 아예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더 신경 써서 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좋긴 하다. 처음 두만강을 건너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꽤 압도되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뇌리에 크게 박힌 장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와 같이 확실히 아이맥스 포맷을 염두에 두고 촬영한 장면들은 보는 재미를 늘려준다. 여기저기 로케이션을 통해 담아 온 현장감 넘치는 배경들과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한다. 게다가 한국영화 최초로 아이맥스 확장비를 토대로 제작된 영화라고 하지 않는가. 결과물까지 좋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를 떠나 어쨌든 이런 시도가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는 국내 영화 제작 발전에 있어 긍정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아이맥스 화면 비율 상의 문제일까, 화면 배치가 굉장히 고정적이라고 느껴진다. 비율 특성상 아무래도 횡으로 뻗어나가는 액션을 구상하기 힘들 수는 있다. 그래서일까, 화면 내 인물이나 소품을 가운데 모아놓고 카메라 쪽을 향하도록 열어놓은 방식을 많이 취한다. 이 배치가 꽤 거슬릴 때가 많다. 게다가 화면을 고정시켜 놓은 장면들이 많아 한 번씩 단조로움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한 '연극적인 느낌'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정적인 카메라의 영향도 꽤 있었을 것이다. 초반 두만강 장면과 같이 카메라와 화면비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살린 장면들을 추가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든다.
6.
사실 큰 기대 없이 올해 마지막 대작 한국 영화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보러 간 것도 있다. 그래서일까, 눈에 보이는 몇몇 허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만족을 안고 나올 수 있었다. 독립운동을 다뤘던 기존 영화들과 다른 모습을 띈 부분에 있어 예상과 같은 큰 흥행이 불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선택은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의 몫이다. 오랜만에 다른 관객들의 호불호가 궁금해진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