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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소가 단순하지만 꽤 영리하게 풀어나간 밀실극

2025_44. 영화 <8번 출구>

by 주유소가맥

1.

복작복작한 지하철을 걸어가던 주인공 '헤매는 남자'는 문득 이상한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지하철역 통로지만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옆에서 무슨 짓을 하든 미동도 없이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인 '걸어가는 남자' 뿐이다. 한참을 헤매다 발견한 것은 이 공간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규칙. '이상현상이 발견되면 되돌아갈 것', '이상현상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것'. 이제 남자는 무한한 지하철역을 빠져나오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2.

영화 8번 출구.jpeg 영화 <8번 출구>

동명의 인디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 <8번 출구>는 당연하게도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다. 2010년대쯤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설정을 가지고 왔고, 게임 자체도 꽤 인기를 끌었으니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작품이 타 매체로 새로 만들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다. 문제는 분량이다. 사실 게임 내용은 앞으로 간다, 뒤로 간다 정도의 짧은 규칙만으로 진행되고, 배경은 무한정 반복되는 단순한 한 공간뿐이다. 이를 어떻게 95분의 영화로 풀어내느냐는 이제 전적으로 영화의 몫이다.


3.

줄거리가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단순하고, 배경도 단순하지만 영화는 이를 꽤나 영리하게 풀어간다. 규칙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에 살을 붙인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것은 남자의 직업이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언급되지는 않지만 얼추 일용직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대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남자가 지하철을 통해 가고자 하는 곳은 그날 생계를 위한 출근지인 것이다.


다음으로 헤어진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나온다. 전화를 통해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전화가 끊긴다. 지하철역에 갇힌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심적인 동요가 일어나는 상황이지만 영화는 조금 더 남자와 관객을 자극한다. 여자친구와의 대화 전, 울고 있는 아기와 그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어린 아기를 데리고 만원 지하철에 타는 것은 민폐'라고 소리치는 아저씨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람에게 이런 에피소드를 심어주는 것은 심적 동요를 더욱 크게 일으키기 위한 장치다.


영화 8번 출구 (3).jpeg 영화 <8번 출구>

이제 주인공은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서도, 여자친구와 아이를 찾아가는 것에서도 모든 부분에서 조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를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개념의 불편함이다. 도륙이 일어나거나 귀신, 괴물이 날뛰는 공간에 갇힌 것이 아니라, 그저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에 갇힌 상황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불편함과 긴장감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의외로 당장의 큰 공포가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영화는 이 상황에서 구태여 시각적인 자극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심적 불편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는다. 이는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기괴함과 어우러져 다른 공포영화와는 또 다른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4.

지하철역에 나타나는 이상현상들은 많은 부분 주인공이 보거나 겪었던 일들에 기반한다. 유전자 조작 쥐, 수해 현장 등은 주인공이 SNS를 통해 훑었던 내용들이고, 여자친구와 아이의 등장은 당연하게도 바로 직전 통화를 기반으로 발생한 이상현상이다. '걸어가는 남자' 또한 주인공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잘못된 출구로 빠져나간 탓에 영원히 지하철역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 극 중반에 밝혀진다. 헤매는 남자와 걸어가는 남자의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지하철역에 갇혔다는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 양육권은 걸어가는 남자에게 없는 것 같으며, 때문에 오랜만에 아이를 만나러 가다 지하철역에 갇힌다. 헤매는 남자는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이제 막 듣고 병원 방문 차 일정을 조율하려는 찰나 지하철역에 갇히게 된다. 이제 이러한 두 사람의 공통점을 통해 이상현상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은 두 사람이 겪은 일 중 아이를 중심으로 놓게 된다.


5.

영화 8번 출구 (4).jpeg 영화 <8번 출구>

두 남자가 가진 아이의 관념적 대체물은 중반에 등장하는 '소년'이다. 걸어가는 남자는 언뜻 보면 소년을 살뜰하게 챙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년과 함께 있을 때에도 소년이 발견한 이상현상들을 함께 찾지 못하고, 소년의 내색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게 본인이 생각한 길을 가다 0번 출구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결국 소년을 포기함으로써 8번 출구를 나가게 된다. 아마 그는 이전에도 이렇게 자신의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였을 것이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 아이보다 본인 입장에서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양육권을 잃게 되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 소년을 버리고 8번 출구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되뇌는 것에서 그가 과거에 어떤 선택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아이를 포기하는 순간까지 합리화하여 나아간 방향이 올바른 방향일리 만무하다. 그렇게 올라간 8번 출구는 이상현상으로 만들어진 곳이었으며, 결국 그는 지하철역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영원히 그곳을 걷는 남자가 된다.


6.

헤매는 남자는 처음 소년을 봤을 때 너무 당연하게도 이상현상이라고 판단한다. 헤매는 남자에게 소년이 이상현상임은 당연하다. 이미 여자친구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반응을 통하여 이와 같이 갑자기 불쑥 나타난 소년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상현상으로 받아들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자는 지하철역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소년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책임지고자 한다. 걸어가는 남자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소년의 의견 또한 충분히 수용하고 결국 진짜 8번 출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헤매는 남자와 걸어가는 남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렇게 자신 앞에 나타난 소년, 즉 인생에 새롭게 추가된 책임져야 할 생명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단초로 헤매는 남자는 지하철역을 탈출한다.


영화 8번 출구 (2).jpeg 영화 <8번 출구>

걸어가는 남자가 찾았던 잘못된 8번 출구는 밝은 빛을 내뿜는 지상으로 향하고, 헤매는 남자가 찾은 진짜 8번 출구는 이전과 같이 사람이 바글바글한 숨 막히는 지하철 출구라는 점에서 대비적이다. 결국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그리고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난히도 현실적인 일이지만,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된다. 두 개의 8번 출구는 두 사람의 태도와 이를 통해 찾아볼 수 있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역설이다.


7.

영화는 세 파트를 통해 극을 나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파트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8번 출구>에서는 그 개인적인 불호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화면, 그리고 막을 나누기 쉽지 않은 영화 설정 상 직접적으로 막을 나누면 이는 오히려 단조로움에 지쳐가는 관객들의 따분함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 POV, 지하철역 세트는 이게 게임 원작임을 충분히 주장하는 요소로 관객들 또한 게임과 영화의 중간 지점에서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특정 공간에 갇힌 주인공과 그곳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한차례 성장을 한다는 내용을 생각해 보면 <1408>이나 <큐브> 같은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들 때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마련해 줄 수 있을지 참고할 수 있는 예시로 <8번 출구>를 새로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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