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45. 영화 <세계의 주인>
1.
주인은 함께 뭉쳐 다니는 몇몇 무리들과 함께 교실과 운동장을 종횡무진하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평범하고 활달한 10대 소녀처럼 보인다. 누구라도 학창 시절을 떠올린다면 기억 속에서 비슷한 친구 한두 명쯤 쉽게 끄집어낼 수 있는 전형적인 청소년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 중 어떤 누구도 주인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는 주인이 학교 생활을 하며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성폭력을 다룬 매체에서 묘사하는 ‘피해자성', '피해자다움'에서 한발 벗어나 인물을 조명한다.
2.
대다수 매체에서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는 영화 속 사과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와 같다. 주인은 사과를 싫어한다고 얘기했을 뿐,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변 인물들은 어림잡아 그 이유를 추측하고 과하게 행동하고 나선다. 그들에게 사과에 대한 주인의 호불호와 그 이유는 의미가 없다. 주인이 겪은 사건과 그로 인한 상처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주인이 이를 어떻게 느끼는 지와는 별개의 문제기 때문이다. 주변인들은 피해자가 피해자로만 존재하도록 인생의 모든 부분에 슬픔을 덧씌우고자 한다. 주인은 사과가 그냥 싫었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알 듯 어떤 대상에 대한 호불호가 반드시 특정 사건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이런 요소들을 통해 나름대로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편견과 태도를 강요하는 실례에 가까운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꼬집는다.
이런 비판은 재판으로 이어진다. 미도에게 피해 사실이 있었음에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가해자와 대화할 수 있었는지 묻는 변호사의 이야기는 굉장한 폭력으로 다가온다. 재판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재판장 밖으로 벗어나서까지 이어진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와 같은 주인에 대한 주위의 끝없는 물음은 앞선 변호사의 물음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피해자는 고통으로 만연할 것이라는 몰이해를 기반한 편견에서 시작된 일상 속 재판이다.
3.
영화는 이렇게 기존 인식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이를 꼬집어내지만, 잔인하게도 주인이 직접 상처를 극복해 내야 하는 것은 변함없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극복은 결국 본인 스스로 수행해야만 이루어진다. 주변 환경과 인물의 영향도 물론 크지만 결국 상흔이 남는 대상은 어쩔 수 없이 사건 당사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생채기라도 직접 눈으로 보면 더 따가운 법이고, 이는 내면의 상처도 다르지 않다. 커다란 상처는 직접 마주하기도, 없는 척 무시하기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극복이란 꽤 벅차게 느껴질 수도 있다. 미도는 과거 집을 나와 태권도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 위해 불을 피우다 벽 한쪽에 그을림 자국을 낸다. 대한은 도장 내부를 새로 칠하면서도 그 부분은 유일하게 남겨둔다. 사실 그 어떤 곳보다 가장 새로 칠해야 하는 부분임에도. 대한은 미도가 직접 그을림 자국을 해결했으면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상처와 극복 대하는 영화의 자세다.
이렇듯 극복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굉장히 어렵고 지치는 긴 과정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긴 과정 속에서 지치지 않도록 기적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기적은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을 실천한다. 이는 하나둘 모여 우리가 바라던 기적을 대체하고 이는 곧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극복을 실현한다. 이 과정은 마치 마술과도 같다.
4.
해인은 마술사다. 아직까지는 실력이 부족해 사라지게 한 작은 공의 행방을 금세 들키곤 하지만 어쨌든 해인은 마술사다. 당연하게도 해인의 마술로 인해 작은 공이 본질적으로 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사라졌다고 믿어주고, 구태여 찾아내지 않는다. 이는 마술사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술이란, 실제로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없어졌다고 믿겠다는 합의가 있어야만 진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마술의 성격은 주인과 그 가족들이 현재를 꾸려가는 방식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주인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게 구태여 꺼내지 않고 평온한 일상을 추구하며, 그나마 주인이 감정적으로 뱉어냈던 울분은 말끔하게 세차된 차 속에서 이루어져 외부로부터 가려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술을 가족들의 근심을 없애는 행위와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해인이 가족들을 학예회에 초대한 것은 사실 자신의 마술 실력을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날레를 장식했던 '근심 없애기 마술'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이 '근심 없애기 마술'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애초에 해인은 그 무엇도 본질적으로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라진 척을 하는 것이 마술사의 책무다. 때문에 해인은 학예회가 아닌 현실에서도 마술을 지속한다. 해인은 주인 앞으로 온 가해자의 편지를 숨기고 종적을 감춘 아버지를 혼자 만나고 오기도 한다. 이는 해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건을 숨기고, 숨은 무언가를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마술사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해인의 마술 실력은 아직 어설프기 때문에 흙이 잔뜩 묻은 신발, 어설프게 침대 밑에 숨긴 편지 뭉치로 이내 트릭을 들켜버리고 말지만, 극 중 누구도 이를 들추지 않는다. 그것이 마술의 기본적인 합의니까. 주인의 과거를 구태여 언급하며 핀잔을 놓는 할머니나 미도가 가해자와 나눈 메시지를 읽어내는 변호사가 밉게 보이는 이유는 이 암묵적 룰을 깨버리고 '그 물건을 사실은 어디에 숨겨놓았다'라고 끄집어내는 눈치 없는 일부 관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관객들이 있어도 해인의 마술은 계속된다. 해인은 마술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통해 가족들이 겪는 상처와 싸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5.
조사 '-의'는 뒤 체언이 앞 체언에 소속되거나 소유될 때 쓰이곤 한다. 이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영화의 제목인 <세계의 주인>은 주인이 세계 속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주인이 자신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할 때, 주인은 편견이 씐 누군가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서 세계 속에 소속된다. 슬픔만이 만연한 세계도 아니고, 편견으로 가득 찬 세계도 아니다. 주인 혼자만을 가둬두는 '주인의 세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속한 같은 세계다.
주인이 활동하는 봉사활동 단체의 한 회원이 '혼자 집에만 있어봤자 부정적인 생각 밖에 더하겠냐'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의 제목이 '주인의 세계'가 아닌 이유다. 주인이 세계에 다시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를 구태여 들춰낼 이유도, 그것을 이유로 다른 시선을 가질 이유도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눈치 없는 관객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