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_14.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1.
SF 장르를 표방한 영화들은 과학 이론을 실제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을 1차적으로 희망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단순히 과학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숫자로만 이루어졌을 법한 과학을 통해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의외로 감정, 그것도 사랑이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그 지점이 강조된 영화다. 비록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타 SF 소설들로 짐작해 보건대, 700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원작에는 거대한 과학적 사건 앞에서 쌓아나가는 인류애적 서사와 이를 뒷받침할 수많은 과학 이론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으리라. 하지만 영화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아무리 156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길다고 하더라도 원작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적절한 선별이다. 그리고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집중해서 가져간 것은 과학적 이론보다는 감정과 관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SF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이론보다는 감정, 그것도 사랑이다.
2.
이런저런 처음 보는 단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는 있으나 이야기는 꽤 단순하다. 어느 날 지구의 태양이 식어가고, 그로 인해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와 인류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원인은 '아스트로파지'라고 불리는 우주 미생물이다. 인류는 아스트로파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 행성 '에이드리언'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단서를 찾기 위해 우주선을 보내기로 한다. 문제는 연료 문제로 우주선이 지구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 즉, 우주선을 타고 나간 사람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주인공 '그레이스'는 에이드리언 행 우주선에 탑승하여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게 된다. 영화는 여러 설정들을 통해 살을 덧붙이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아, 그렇구나'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정보쯤이다.
그레이스는 우주 한복판에서 또 다른 우주선을 만난다. 그 안에 타고 있던 것은 외계 생명체 '로키'다. 로키의 행성 또한 지구와 같은 문제로 죽어가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주를 여행하게 된, 다시 말해 그레이스와 같은 목적의 여행자다. 제아무리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지만, 외계인까지 영어를 쓸리는 만무 하다. 두 인물에게 필요한 것은 통역이다.
3.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소통은 같은 인간과 인간 사이보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과 외계인 사이에서 더 진솔하고 영향력 있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지구에서 본인의 이론을 인정받지 못해 학계에서 외면받는 인물이다. 회의에 참석해서는 제대로 대화 주도권을 가져가지도 못하며 우주로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단순히 아스트로파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제적으로 우주선에 태워진다. 이때 그레이스의 발화는 아무 의미도 없다.
언어란 결국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해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혹은 존중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숭고한 희생임은 인정하지만 모든 인류가 살 수 있으니 당신의 죽음을 응당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무슨 폭력적인 얘기냐,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누구 하나 사지로 내몰 수 없으니 우리 같이 죽음을 맞이합시다' 얘기하며 가로막을 수 있을지 확답하지 못할 것 같다. 애초에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인물인 그레이스가 살아남을 인류 무리 속에 합류 하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로키에게 그레이스는 그것이 실제 자신의 신체든,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연료든, 어쨌든 본인을 희생해서까지 챙겨야 할 인물이 된다. 다시 말해 타자화하지 않고 함께 살아나가야 할 관계가 되었을 때, '우리를 살려줄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와 살아갈 누군가'가 되었을 때 둘 사이의 소통이 빛을 발한다. 우리는 그레이스와 로키의 대화, 그리고 그 사이에 피어 나오는 감정을 보며 진짜 소통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돌이켜보게 된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 필요한 고찰이다.
4.
여러 영화가 문득문득 스쳐 지나간다. 그레이스와 로키 사이의 소통에서는 자연스럽게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텍트>가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패배자'에 가까운 인물에게 전 세계의 운명이 걸려있고, 이를 위해 각성하는 주인공을 보고 있자면 언뜻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 대부분이 우주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확실하게 눈요기 시켜준다. 익숙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오락적인 재미와 시각적인 즐거움까지. 앞으로 남은 2026년 동안 여러 SF가 개봉하겠지만, 그것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높은 순위에 올릴 영화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