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1967)
<졸업>은 언제 다시 꺼내보든 다르게 느껴지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청춘이 왜 가라앉는가? 고요(silence)에 어떻게 소리(sound)가 있는가? 벤자민이라는 캐릭터의 심리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것이다. 벤자민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 모범생으로 ‘졸업’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전에는 누군가 정해 놓은 과정을 착실히 따라왔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목표를 잃게 되고, 때마침 눈앞에 나타난 로빈슨 부인은 갈 곳 잃은 그에게 새로운 목표 혹은 따라야 할 새로운 대상이 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능동적인 선택을 해본 적 없는 청춘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렇게 방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스러운 처사다.
<졸업>이라는 통과의례는 여러모로 모순적이다. 틀에 박힌 교육과정으로 엘리트를 양성하는 사회, 그리고 마침내 그 과정을 마쳤을 땐 길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는 점. 벤자민과 일레인은 세상이 이상한 규칙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저절로 생겨난 규칙들에 맞춰 돌아간다는 거다.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그런 이상한 규칙과 같은 소음이다. 창문을 올려 소음을 차단해버리는 벤자민은, 아직 ‘졸업자’가 되어 그 이상한 규칙들을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벤자민은 졸업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목적,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아 헤맨다. 따라서 일레인을 향한 그의 마음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이루어내야 할 목적과 집착에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버클리까지 일레인을 따라가 방을 구하고, 결혼식장까지 엽기적인 방법을 써가며 쫓아간다. 이러니 벤자민이 하는 행동의 동기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캐릭터 자체가 비호감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일레인과 결혼식장에서 도망 나와 버스에 앉은 그의 표정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들 한다. 허탈함과 침식의 표정이다. 일레인이라는 목표마저 졸업해버렸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선택을 할 수 없는 청춘은 내내 허탈하고 방황한다. 누군가 20대와 30대의 방황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20대에는 손에 잡히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방황한다면 30대에는 적어도 현실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걱정하게 된다고. 벤자민도 이유 모를 방황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벤자민 이외의 캐릭터들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로빈슨 부인은 대체 왜 저러냐고들 묻는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인 로빈슨 부인은 청춘을 되찾고 싶어 하는 인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벤자민에게 ‘네 나이가 그립다’던 로빈슨 씨를 비롯해 어른들은 확신이 없는 청춘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리워하곤 한다. 이들은 오히려 손에 잡히는 방황들만 하다가 삶의 권태를 느끼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졸업>은 어느 시기에, 혹은 어떤 심리상태에서 꺼내보느냐에 따라 공감하는 인물이 달라져 다르게 보이는 영화다.
이 영화의 원제가 ‘Graduation’이 아니라 ‘The Graduate’인 이유를 생각해 봤다. 한국 제목인 <졸업>은 편의상 전자를 택한 듯한데, 원제를 직역하면 ‘졸업’이 아니라 ‘졸업을 한 사람’으로, 통과의례보다는 사람에 초점이 가 있다. 인생은 여러 겹의 졸업, 통과의례를 거치는 것의 연속이고 우리는 ‘졸업자’라는 타이틀에 익숙해지기 위해, 혹은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저마다의 방황을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