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스튜어트 감독 데뷔작 <물의 연대기>를 보고

내가 제작자였다면, 그녀의 차기작을 위해 집 팔았다

by 필르밍

물의 연대기

2025년 개봉

크리스틴 스튜어트 연출, 각본

동명의 소설의 원작을 각색


간만에 새로운 영화 관람의 경험이었다. 오전 9시 조조 영화를 보러 간 나는 28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상영관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그 사실마저 쓸데없이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로 찬탄하지 않을 수 없는, 창조성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물론, 영화란 경험 자체가 흥미로워야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시작되는 감동은 경험 도중에 발생하는 것과는 아예 궤를 달리 하는 깊이의 것이다. 이 영화는 단언코 두 번 시작했다. 곱씹을수록 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진정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낼 것이라는 기대에 격분이 일는다. 그 미묘한 존재적 경험과 감상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지만, 간지럽고 답답한 그 층위를 긁어줄 것이라는 희망을 느낀다.


(굳이 부언하자면, 나는 이른바 여성 영화라 불리는 작품들, 여성적이라 명명된 영화들이 정작 여성적이지 않다고 느낀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성적이란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별이 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영향으로부터 비롯되는 특질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따지자면 인문적인 맥락에서의 여성적 삶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 역시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과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남성성의 이야기가 가부장적 정의 안에서 설정된 이상을 따라가지 못해 붕괴하는 남성 자아 문제 뿐일까)


보고 나와서 아래와 같이 감상평을 휘갈겼다.

이미 V.O 범벅인데, 보여지는 이미지는 새롭지 않고, 영상적 서사도 친절해서 그 무엇도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저 트렌디함과 센슈얼함을 답습하는 듯해서 실망스러운 시선으로 초반을 봤다.

과한 독백은 끝까지 지속되었으나, 점점 그 문장들의 날카로운 오리지널리티와 연출적인 터치, 그리고 적절한 배치로 정당화되었다. 심지어는 평소에 신봉하는 영화의 "Show, not tell"이 영화의 무긍무진한 표현력을 제한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애초의 실제 인생을 살아가는 경험이 얼마나 언어적인데 발화를 제한하는가.

너무나 지겨운 성적 폭력의 가해자 아빠와 피해자 딸의 서사를 꽤나 선방하여 새롭게 들려주었다.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들 - 공격성과 과도한 방어성, 충동성, 울분, 혼란, 성에 대한 왜곡된 감각 - 이 지겹기도 했으나 피해갈 수 없는 피해의 여파인 것을.

전반에는 너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보이는 듯 했고,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 짚을 수 없는 자아가 비대하게 (연민과 포장) 다가왔지만, 후반에는 창작자의 시선 상에서의 어떠한 기만과 허위 혹은 태만도 감지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공감하고 이해하고 연민하고 응원하며 봤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인터뷰

중 인상 깊었던 부분들 정리 (의역 있음)


From IndieWire's Filmmaker Toolkit: 'The Chronology of Water' Director Kristen Stewart, Jan 9, 2026 https://podcasts.apple.com/kr/podcast/indiewires-filmmaker-toolkit/id1142632832?l=en-GB&i=1000744447384&r=655

이 책의 플롯보다도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형식이 영감을 주었다.

8년 동안 500번 가까이 각본을 퇴고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영화에 이입해서 자기를 투영할 것을 요구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작품을 볼 때 인물이 '무엇'을 보는지 보다 '어떻게' 보는지가 더 흥미로울 때가 있고, 인물이 얘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신뢰와 인내심과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아이디어들을 지시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고, 관객을 영화에 초대하고 싶었다.

책처럼 이 영화는 진행할 수록 자라난다. 처음에는 걸을 줄도 모르고, 자신의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기저기 절뚝거리지만, 주인공이 똑똑해지고 행복해지고,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지혜를 축적할 수록 영화도 점점 침착해진다. 그래서 그 (집필하는) 8년 동안, 방금 설명한 감정적 구조를 모방하는 과정이었다. The movie is a book being written

I am every person I've ever been if you let yourself drift into the sort of waters of your physicalized memory.


그 외 문장들은 챗gpt를 통해 한 문단으로 구성:

예술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기 위해 깊이 파고드는 과정이며, 욕망을 규정하는 것들을 발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오래 듣는 일을 요구한다. 이 영화가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작이 그러한 태도를 허락하고 장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거대한 허가증이자, 자신의 의지로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와도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소 통제 불가능해 보일 만큼 거칠고 자유로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신뢰하라는 말을 하면서도, 정작 어떻게 자신에게 충실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는 우리가 가진 것 중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방식, 즉 기억이 신체 안에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가장 가깝게 재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 머릿속을 점령하는 수많은 목소리에 의해 과잉으로 정치화되고 소비되며 침식되어 왔다. 특히 여성의 경우, 가부장적이고 신격화된 부성적 목소리들이 우리의 신체적 경험 깊숙이 침투해 왔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필사적으로 파고들어 그 심연으로 관객을 데려가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추는 빛을 찾아내려는 시도이다.


“I made a movie about women getting things off their chest. And those things are heavy, and they don't have to be if we all just hold them together”




리디아의 개인적 이야기 즉 플롯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직후 관람평에 이미 적었듯) 나에게는 이야기적 기만이나 창작 태도의 태만이 느껴지지 않는 설득력 있는 서사였다. 영화에 깊이 몰입하긴 했지만, 리디아라는 단일한 인물의 생명력에 이끌린 감상은 아니었다. 나는 감독의 설계와 의도대로 작품의 플레이스홀더(빠져 있는 다른 것을 대신하는 기호나 텍스트의 일부)와, 흐름, 그리고 대사 등에 이끌려서 본 것 같다.


매우 영리한 영화이지만, 기대 없이 보는 관객들에겐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다. 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점점 더 괜찮아지는 것을 보며, 초반의 평이한 흐름이 사실 관객에게 평가할 만한 말과 단순한 이미지를 던져 아직 새로운 영화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주의력을 붙들어 두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추측은 지나치게 짧고 상업적인 해석에 불과했다. 그것은 관객의 주의력을 계산한 가벼운 전략이 아니라 영화의 태동이었다. 아이의 상태에서 점차 성장하며 삶을 더듬어 가는 과거의 리디아와, 글을 적기 위해 기억을 더듬고 있는 현재의 리디아, 그리고 내재한 이야기의 형태를 아직 구체화하기 전 더듬거리는 영화가 서로 겹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부분은 의도적으로 감각적 이미지들과 비선형적 기억, 연속적 감정성만으로 구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자신을 투영하기 전에는 공허한 이미지와 보이스오버의 나열로 느껴졌던 것이고. 실제로도 그것들은 기억의 파편과, 침투적 사고intrusive thought의 목소리였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일관된 혹은 새로운 무언가를 탐지할 수 없어 별로라고 잠정적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내가 그 의도를 읽어내지는 못했을지라도,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결과적으로 그 의도에 부합하는 효과를 달성해 냈다. 나는 처음에는 참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이입하며 보고 있었다. 볼수록 책과 영화가 비유하듯, 기억의 수水성에 나 역시 동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감독님의 취향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투영하도록 요구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과거의 파편들을 굳이 꺼내 보고 싶지도 않고, 그에 수반되는 감정이나 자기연민에 빠지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앞에서 나는 일정 부분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런 관람 이후, 그것이 정확히 의도된 결과였다는 인터뷰를 접했을 때, 나는 이 사람이 쏟아부은 노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능력에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평가 중에, 에세이 같다는 비난은 이해할 수 있지만, 포르노 같다는 평에는 답답함을 느낀다. 만약 이러한 이미지를 남성 감독이 다뤘다면 그 지적에 대체로 동의했을 것이고, 여성 감독의 경우라 하더라도 서사의 요구가 있을 때에만 이러한 이미지의 사용이 정당화된다고 믿는다. (물론 정당화의 필요성부터 논쟁적이지만 현재로선 먼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수많은 여성 감독의 숏들에서도 포르노적인 시선이나 그러한 사용 의도가 느껴진 적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정확히 그 맥락에서,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신체의 숏들에서 해방감과 쾌감을 느꼈다. 내가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성적 대상화로부터 자유로운 여성 가슴의 이미지를 본 적이 있었을까? 물론 나 역시 내면화된 사회적•가부장적 목소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이미지들 앞에서 반감이 먼저 들고, 리디아의 방탕하고 제멋대로인 모습을 볼 때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싶은 충동과, 피해자에 대한 이러한 묘사와 정당화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경험은 더욱 중요했고, 특별했다.


애초에 그런 관념에는 정답이 없다. 여성이 살아가며 자신의 신체와 맺는 관계와 경험은 말할 것도 없이 삶의 중심에 놓여 있고, 성과 관련된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도덕률로 축소하고 단순화한 채, 삶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혼란과 경험마저 비난할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이런 영화에서조차 여성의 나체 신체 이미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의 신체와 성이 경험의 주체/대상이자 혼란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인가. 이는 대체로 시급성은 커녕 유효성도 인정 받지 못하는 주장이여서 참으로 답답하지만, 그렇기에 이 작품이 이 세상에 필요하다.



감독님이 말한 “영화라는 매체는 우리가 가진 것 중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방식, 즉 기억이 신체 안에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가장 가깝게 재현하는 수단”이라는 견해는 특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게 예술의 일반적 속성 아니냐는 나의 습관적인 반박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억과 사고라는 이 지극히 언어적이면서도 시청각적인 작동을 가장 닮은 매체는 확실히 영화인 것 같다.


기억의 물성이라... 나, 신체, 물, 기억은 서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유형과 무형, 비정형성, 응집성, 반사성, 비선형성, 침투성, 유동성. 음.


파괴력이 숨어있는 포용성을 가진 물의 수성에 이 영화는 많은 것들을 빗대고, 또 그러한 수성적인 방식으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 작품은 한 가지 매우 불확실한 전제 위에서 전개된다. 즉, 관객이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고 작품에 자신을 투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품은 관객 각자의 마음 속 어딘가까지 가닿아야만 모든 것이 작동한다. 하지만 그것을 보장할 장치나 조건은 없다. 누군가 이 작품을 보고 별로라고 평가한다면, 대부분의 작품과 달리 반문할 여지가 없으며, 그 관객이 그렇게 평가할 정당성은 충분하다. 이 작품이 요구하는 것은 투영인데, 작품이 투영하게끔 만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면, 어떠한 반론이 가능하겠는가. 게다가 이 영화의 표면적 이야기는 핍진성과 별개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지겹게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영화들이 감수하는 리스크다. 스스로를 개방한 담대한 작품은 와닿을 때는 강력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그저 형편 없게 느껴진다.


어쨌든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깊고 다층적이며, 영화의 그 어느 부분도 허투루한 곳이 없다. 가족, 정체성, 연대, 폭력과 피해, 회복, 기억, 서사화, 신체, 성 등등. 다 떠나서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리디아가 글 쓰는 친구 및 다른 한 명이랑 어울릴 때의 시퀀스가 참 좋았다. 이 글의 헤더 사진이기도 한 장면이나, 같이 상의를 벗고 바다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내가 다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도, 그들을 향한 시선과 다루는 거리감도 좋았고, 캐스팅도 좋았고, 연기도 너무 훌륭했다. 여주도 진짜 너무너무 훌륭했다.


아 정말 재밌는 관람이었다. 좀전에 도서관에서 <물의 연대기>를 빌렸는데 얼른 읽어봐야지.


책을 읽고 덧붙이는 후기 및 비교


책과 영화를 비교하면 원문 쪽이 훨씬 생명력이 넘치고 시끄럽고 과하다. 그리고 더 직접적이다. 이야기는 각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새로운 작가의 질감을 통과해 변질된다. 책의 리디아가 요란하게 끓어오르는 에너지라면, 영화의 리디아는 그럼에도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다. 그것이 리디아에 새로 씌워진 새로운 작가의 레이어일 것이다.

잔잔한 에너지로 꾸려진 영화에는 여백이 많아 나를 투영할 수 있었던 반면, 책은 내내 직접적이고 과잉이라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또한 영화에서 리디아가 자신의 성과 신체를 경험하고 서술하는 방식은 자유로움을 선사했으나, 책에서는 그 개방성이 유교적인 나에게 너무 아득한 수준이라 당혹감을 주었다. 물론 흥미롭기는 했다. 손에서 놓지 못하고 순식간에 완독했으니까.


책을 읽으며 재방문하게 된 영화에서도 봤던 일부 일화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감정선을 이해하고 느끼며, 영화의 부족한 설명이 불친절했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영화의 톤다운된 에너지가 영화가 제공하는 방식의 친절함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책과 영화 둘 다 다른 매력이 아주 매력적이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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