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 스튜어트의 <자유론>을 2026년에 읽으며

167년이 지난 오늘 유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

by 필르밍


들어가며

이 명저를 처음 접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유명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읽어놓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읽기만 하고, 글자만 훑었을 뿐 정작 내용을 제대로 숙고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미 읽었다고 다시 읽을 생각을 안 하고 살다가, 감사하게 독서모임 덕분에 다시 읽었다. 그러며 이 책이 얘기하는 것들이 오늘날 얼마나 유효하고 시급한 지를 깨달았고, 존 스튜어트 밀의 빈틈없는 논리와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노트를 하다 보니 A4 문서 9쪽이 나왔다. 이 얇은 책에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읽는데 3-4시간은 걸린 것 같다. 책을 덮은 후에도 논지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왜냐하면 생각할수록 오늘의 민중도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부자유를 인식하고, 자유를 목적하는가. 과연 오늘 부자유의 모습은 그때와 어떻게 다른가와 같은 의문들.


그러한 현대 자유에 대한 고찰과 연구 및 관련 저서가 많이 나왔을 텐데 아직 찾아보거나 읽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멋대로 후기 먼저 쓰고 나중에 관련 서적을 찾아보다가 이 글을 발행 취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부분들을 정리하기엔 책이 이미 중요한 부분밖에 없어서 생략하고, 흥미를 유발한 부분들 위주로 짧은 감상글을 적어보고자 한다.


흥미로웠던 문장들

정치적 사유에서, 이제 ‘다수의 횡포 tyranny of the majority’는 사회가 일반적으로 경계해야 할 해악 중 하나이다.

의견의 혁명 속에서도 일반적으로 한 부분의 진리가 가라앉으면 다른 부분의 진리가 떠오른다. 진보란 본래 기존의 진리에 엄청난 것을 더하는 일이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하나의 진리를 또 다른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진리로 대체하는 대 그친다. 우리가 개선이란 표현을 쓸 때, 대체로 새로운 진리의 단편이 그것이 대체한 진리의 단편보다 더 필요하고 시대의 요구에 더 적합함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유에 대해 보여주는 이 기묘한 존중과 동시에 드러내는 기묘한 존중의 결핍을 비교해 보면, 마치 인간이 타인에게 해를 끼칠 권리는 절대적으로 보장받아야 하고,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고 자신을 만족시킬 권리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듯 보일 지경이다.


취향과 추구의 자유

밀은 반복해서 삶의 계획을 개성에 맞게 설계하고 행동할 자유를 옹호한다. 그는 개인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살아갈 자유를 가져야 하며, 그 선택이 어리석거나 고집스럽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간섭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그러한 선택의 결과를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독서 토론 모임에서는 이 주장에 위로를 받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롭게 살되 책임은 개인의 몫이라는 이 명제가 환경적·인과론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에게 과도한 책임을 귀속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나는 후자의 문제 제기에 공감했다.


밀의 자유 개념은 규범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작동할 때는 특정한 인간상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이 자유는 대체로 신체적·정신적으로 큰 제약이 없고, 자신의 삶을 계획할 인지적 여유와 그것을 실행할 최소한의 자원을 가진 개인을 암묵적으로 상정한다. 이러한 전제는 능력주의적 사고와 쉽게 맞물린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했고,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는 곧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역량과 판단의 결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스스로 극복해 왔다고 믿는 난관들을 떠올리다 보면, 개인의 불행은 결국 극복하지 못한 개인의 책임이라는 생각으로 기울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극복했다고 여겨온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온전히 자력만으로 일궈낸 것은 없다. 물론 이 문제를 밀 역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책의 말미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분명히 언급한다. 사실 읽는 과정에서 군데군데 일종의 선민의식에 가까운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의 군중은 오늘날보다 훨씬 제한된 정보 접근성 속에 있었고, 종교라는 거대한 권력이 사고를 가리는 베일로 작동하던 시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실제로 몽매한 상태에 있었다는 진단 역시 전적으로 부당하다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가 결핍된 자원 속에서 근시안적인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에게 무엇이 이로운 삶인지에 대한 판단과 그 삶의 방식을 외부가 강제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는 수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덜 해로운 선택이자 차악으로서의 최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래의 문장이 냉담하게 다가온다.


누가 뭐라 해도 성숙한 나이에 이른 개인이야말로 당사자로서 자신의 행복에 관심이 가장 큰 사람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그의 행복에 가질 수 있는 관심은 그 자신이 가지는 관심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은 그가 선택한 것이 자신에게 바람직하거나 최소한 감내할 만하다는 증거이다.


자유라는 선善

밀이 자유를 옹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선이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당대 사회가 효용의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자유가 더 이상 선을 낳지 않거나, 기대했던 만큼의 이로움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때에도 자유는 여전히 옹호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자유는 선이기 때문에 보호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정한 해악을 낳는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존엄적 가치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


밀에 주장에는 자유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그는 진리에 대한 모든 측면을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다양성이 해악이 아니라 선이라고 말하며,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 논쟁이나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교리들의 수는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더 나아가 인류의 행복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의 수와 그 중요성으로 측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행복을 최고 가치로 삼는 공리주의자인 밀에게 하나의 궁극적 지향점처럼 읽힌다.


이러한 진술들을 종합하면, 밀에게서 자유와 다양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인류가 여전히 불완전한 진리의 상태에 놓여 있는 한에서 가장 이로운 조건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재로서는 진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의 충돌과 논증을 통해 더 나은 이해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며, 자유는 바로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최적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일 경우, 만약 진리에 대한 인식이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한다면, 오히려 그 진리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이단적 의견이나 다양성이 해악으로 간주될 가능성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물론 이는 밀의 사유를 다소 종결론적으로 확장한 해석일 수 있다. 실제로 밀에게서 진리는 고정된 완결 상태라기보다는 반복적인 검증과 반박 속에서 살아 있는 신념으로 유지되는 성격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가 자유와 다양성을 조건부로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자유가 궁극적 가치라기보다 진리를 살아 있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여지를 남긴다. 이러한 점은 그가 도덕성과 여론의 압력이 강하게 작동하던 시대에 살았다는 역사적 맥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 중요성을 직접적인 권리 담론이 아니라 진리와 효용의 언어로 설파해야 했던 조건 속에서, 그는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으로 진리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제 두 가지 문제가 드러난다. 하나는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경우 나타날 것이라 밀이 기대했던 선의 결과들이 오늘날 실제로 실현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밀이 옹호한 표현의 자유는 오늘날 형식적·제도적 차원에서는 상당 부분 실현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부자유함을 느낀다. 오늘날 문제는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말했을 때 감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에 가깝다. 과거에는 진위 판단과 제재의 주체가 국가나 제도화된 여론처럼 비교적 명확했다면, 오늘날에는 수많은 개인과 집단,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분산되어 있다. 발언은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비난, 오해, 맥락 상실, 낙인과 같은 사회적 결과를 동반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반작용 자체를 곧바로 표현의 자유 침해로 규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러한 압박이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개인의 판단 속에 상시적인 위험 계산으로 내면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자기 검열은 명시적으로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고려한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나타난다.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는 구조 속에서, 자유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작동 방식은 모호해진다.


물론 다수를 침묵시켜 온 힘 역시 언제나 이러한 내면화된 위험 계산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부자유가 과거보다 더 내면화되었기에 더 심각하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침묵시키는 기준이 과거에는 비교적 명확하고 이분법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그것이 지나치게 분화되어 판단의 기준 자체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을 짚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밀의 문제의식, 즉 다수의 압력이 개별성을 억압한다는 진단은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유효하다.


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사회의 도덕의 상당 부분은 그 계급의 이익과 계급적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스파르타인과 그들의 노예, 농장주와 흑인 노예, 왕자와 신하, 귀족과 평민, 남성과 여성 간의 도덕은 대부분 이러한 계급적 이해관계와 감정의 산물이었다.


밀이 내놓은 당시 사회에 대한 분석을 읽다 보면, 그것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람들은 어떤 의견이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기보다는, 믿고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믿는 경우가 많다. 이 점에서 지금은 정보 접근성과 표현의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음에도, 진리가 언제나 집단적 필요와 시대적 요구 속에서 소비되어 왔다는 인간의 특성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대처럼 보인다. 종교적 권위나 정보 접근의 제한과 같은 시대적 장애물이 상당 부분 제거된 지금에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사실 진리가 그 자체의 진실성에 의해 존중되던 시기는 역사적으로 드물었다. 오늘날에도 ‘옳고 그름’은 점점 어떤 의견을 정정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하고, 대신 그 의견이 어느 집단의 정체성과 결합되어 있는지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인류가 진리를 대하는 방식은 그 시대가 허용하는 자유의 수준과는 별개로, 앞으로도 유사한 양상을 반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시대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인간의 조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인간은 언제나 평범함에 순응하거나, 진리의 이름 아래 시류에 맞추어 사고해 왔다. 많은 주장들이 진리 그 자체보다는 청중을 전제로 구성되는 것 또한 언어의 본질이 지닌 사회적 성격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오늘날의 정보 환경과 결합하면서 훨씬 강하게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밀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수많은 의견의 대립은 반드시 진리의 진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 시대는 목도했다. 오히려 그가 이미 경고했듯, 의견의 대립은 쉽게 분파주의의 심화로 귀결된다. 특히 오늘날에는 밀이 그러한 대립 속에서 혜택을 보리라 상정했던 냉정한 방관자가 존재할 자리를 잃고 있는 듯 보인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입장을 요구받는 환경에서, 개인은 판단을 유보한 채 관찰하기보다는 이미 자신이 속한 다른 논쟁의 진영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 결과 논쟁은 상호 검증의 장이라기보다, 정체성이 충돌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표현의 자유는 진리의 진보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곧 자유 자체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밀의 자유론이 약속했던 것은 진리의 도달이 아니라, 오류를 수정할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는 사태를 막는 최소 조건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한계는 자유의 원리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자유가 작동하는 사회적·기술적 환경의 문제에 더 가깝다.


결국 지금의 상황은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며,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국면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자유론>이 제시한 자유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현재의 분화된 진리 환경과 자기 검열의 구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자유 이후의 조건을 사유하는 더 진전된 담론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는 상반된 가치관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집단적 권위를 흔들림 없이 믿는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속한 세계의 것과 비교해 더 옳다고 주장할 책임을 자신이 속한 세계에 전가한다.

사람들이 자기 의견이 진리라서 믿기보다 그 의견이 없으면 무엇을 할지 모를 것 같아 확신하는 시대, ‘신앙을 잃었으나 회의주의에 두려움을 느끼는 시대’로 묘사되는 오늘날, 어떤 의견을 공적 공격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의견의 진실성보다는 그것이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가에 기반을 둔다.

이런 지적 평화를 위해 인간 정신이 발휘할 수 있는 온전한 도덕적 용기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가장 활동적이고 탐구심이 강한 지성들조차 자기 신념의 기본 원칙과 근거를 가슴에 간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또한 자기 내면에서 수긍하지 못하는 주장을 공중 앞에선 맞장구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선, 한때 사유의 세계를 빛냈던 개방적이고 두려움 없는 인격자들과 논리적이며 일관된 지성인들을 다시금 배출할 수 없다. 고작해야 평범함에 순응하는 자 들이거나, 진리의 이름 아래 시류에 맞춰 행동하는 자들만 있을 뿐이다. 이들이 모든 중대한 주제들 두고 펼치는 주장은 청중을 위한 것이지 스스로 확신하는 결론은 아니다.

의견의 혁명 속에서도 일반적으로 한 부분의 진리가 가라앉으면 다른 부분의 진리가 떠오른다. 진보란 본래 기존의 진리에 엄청난 것을 더하는 일이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하나의 진리를 또 다른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진리로 대체하는 대 그친다. 우리가 개선이란 표현을 쓸 때, 대체로 새로운 진리의 단편이 그것이 대체한 진리의 단편보다 더 필요하고 시대의 요구에 더 적합함을 의미한다.

나는 모든 의견이 분파주의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가장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치유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종종 심화되고 악화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보아야 했으나 보지 못했던 진리를, 반대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선포하게 되면 더욱 격렬하게 배척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의 충돌이 유익한 결과를 미치는 대상은 열정적인 당파적 인물이 아니라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방관자들이다.


비록 나는 밀의 자유 개념이 다른 목적을 위한 조건부 선으로 전락할 가능성에 의구심을 제기했지만, 이는 개념을 점검하기 위한 가정에 가까웠다. 인류는 궁극적 진리를 손에 넣을 수 없기에, 자유는 영원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에서 의견의 대립 역시 진보를 위해 불가결하다. 문제는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밀의 기대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의견 대립은 진리의 갱신보다는 불완전한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또한, 나는 오늘날 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본다. 취향과 표현은 다채로워졌지만, 진리의 관점에서 검토 가능한 입장의 범위는 정체성과 진영의 경계 안에서 수축되고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은 병렬적으로 공존할 뿐, 서로를 수정하거나 침투하지 못한다. 이는 밀 자신이 이미 우려했던 환경의 동질화와도 맞닿아 있다. 사람들이 점점 비슷한 것들을 읽고 보고 듣는 조건 속에서, 의견의 내용이 아니라 의견이 형성되는 조건 자체가 획일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립은 실질적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공유된 전제 위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절차로 전락한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와 공개적 토론의 중요성은 결코 퇴색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이 형식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실제로 진리의 검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더 엄격히 물어야 한다. 우리는 표현할 수 있지만, 그 표현이 진리를 갱신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자유가 새로운 조건 속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 시대인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책은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너무나 시급하고 유효한 것이다.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의복을 버렸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옷을 입어야 한다. 다만 유행이 1년에 한두 번 바뀔 수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가 일어날 때 변화를 위한 변화가 되는데 주의를 기울인다.

토크빌은 그 마지막 중요한 저서에서. 현재의 프랑스인들이, 이전 세대 프랑스인들보다 서로 훨씬 더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로 다른 계층과 개인을 둘러싸고 그들의 개성을 형성하는 환경이 날마다 더욱 동질화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현재의 사람들은 상당 부분 비슷한 세계에서 살아가며 이들은 이제 똑같은 것들을 읽고 듣고 보고 똑같은 장소를 방문하며 똑같은 목표를 향해 희망과 두려움을 품고 똑같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이를 주장할 똑같은 수단을 지니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코끼리는 그 곳에 있어>를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