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그 곳에 있어>를 보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삶의 심연을 더듬는, 지심한 비관과 아이러니한 아름다움

by 필르밍

*스포주의*


나는 영화든 책이든, 현실을 허구의 형태로 다루더라도 그것이 진실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끝내 몰입하지 못한다. 반대로 작품이 건네는 이해가 너무도 진실하게 느껴질 때, 나는 하염없이 굴복해 그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한다.


아 정말 미친 작품이었다. 영화관에서 보지 못한 게 통탄스러울 정도이다.

후보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미 거장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만약 이후에도 계속 작품을 만들었다면,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자리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떻게 데뷔작이 이토록 높은 완성도를 가질 수 있을까. 스토리와 플롯, 연기와 대사, 호흡과 미장센은 물론 감동과 재미까지, 빠지는 요소가 없다. 대사 하나하나, 카메라의 움직임 하나, 플롯의 전개 하나까지도 끊임없이 관객을 놀래키고 주의력을 흡인한다.


어쩔 수 없이 감독의 자살을 떠올리게 된다. 이토록 탁월한 재능을 지닌 그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물론 삶에는 수많은 층위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충동이라는 비이성적인 동력이 작동하기에 모든 것을 작품에서 읽어낸 의미와 직접적으로 결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영화 속에서 웨이부는 상을 받은 성취에 대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에 시간을 낭비하면 그리 된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나는 어느새 이 영화의 텍스트 안에서 감독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무의식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영화는 끝내 코끼리의 울음소리를 들려주며 실낱같은 희망을 건네지만, 감독의 자살이라는 사실은 그 희망마저 무력화시키고, 절망에 가까운 여운만이 남는다.


이 영화가 훌륭한 이유를 나열하려면 네 시간은 가뿐히 넘길 것이다. 지금은 그저 어제 영화를 보고 느낀 여운과 해석만 간단히 적고자 한다. 이 작품은 '각본'을 공부하기 위해서도, ‘연출’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보고 싶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고, 비록 아래에서는 코끼리에 대한 해석만 다루었지만, 이 영화가 ‘사실’이라는 개념과 그 차원을 다루는 방식이 감동적일 정도로 탁월했다는 점은 미리 적어두고 싶다. 이야기며, 연출이며, 인물이며, 배경(사회)이며, 영상미며 진짜 완벽한 영화였다.



코끼리가 상징하는 것

친구가 얘기해준건데, 만저우리에 있는 서커스단에 코끼리 한 마리가 있는데, 늘 한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한대. 사람들이 찌르는 게 싫었거나, 거기 앉는 게 좋아서겠지. 사람들이 난간에 몰려들어 구경하고, 먹을 것을 던져 줘도 꿈쩍도 안 한대.

인물들은 이 이야기가 무엇이 그토록 재미있는지, 계속해서 꺼내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다만 어딘가 자신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른, 실재하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미상의 존재에게 마음을 대피시키고 기대고 있는 것이다. 코끼리는 그들이 보려고 하는 무언가이며, 그들이 바라보는 순간부터, 코끼리에는 이상이 투영되어 그 이상의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가면 돼. 가 보면 알게 될 거다. 달라지는 건 없어. 살 만큼 살고야 알았어. 예전에는 보기 좋게 꾸몄지. 뭔가가 다를 거라고. 내 말뜻 알겠나?"
소년: "알겠어요."
할아버지: "넌 몰라, 지금 딴 생각하잖아. 제일 좋은 방법은 여기 이곳에 서서 저 멀리 딴 곳을 바라보며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떠나면 안 돼. 여기 있어야 이곳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할아버지는 소년에게 굳이 진실이나 의미에 가닿으려 애쓰지 말고, 그저 제자리에서 스스로를 기만하더라도 희망을 신뢰하며 현실을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소년은 함께 가 보자고 그를 설득한다. 그들이 교환하는 시선에는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실려 있다.


그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그곳에 코끼리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이 의미를 찾기 바라서보다도 고단한 하루의 위안이 될 것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분명히 울려 퍼지는 순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사실은 주어지지 않았다. 과연 그 코끼리는 앉아 있을까?


우리는 사실이라는 소망에 가까운 추상적 개념에 다가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령 그 일부를 손에 넣는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애초에 이 코끼리 일화의 출처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친구의 전언에 불과하고,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실종된 휴대전화를 둘러싼 진실처럼 어느 쪽에도 의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어려운 여운을 남긴다.


‘진실’은 수없이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논의되어 온 주제이지만, 이 작품은 (내가 지금껏 접한 작품들 중) 유례없을 정도의 비관으로 그것을 다룬다. 작품이 마지막에 제시하는 희망은 결코 사실이나 의미에 관한 것이 아니다. 끝내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희망을 선사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시궁창 같은 현실을 살고 있고, 길고 거지같은 하루를 보냈지만, 희망은 그런 신세를 공유하는 타인이 존재하며 그들과 함께한 여정 속에 어떤 결실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결국 후보가 긍정하는 것은 거대한 진실이나 구원이 아니라,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서로 나눈 미미한 연대와 찰나의 유대였을지도 모른다. 바로 다음에 이어질 것이 단절과 고통임을 예견하면서도 말이다. 삶은 부조리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 부조리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절망에 가까운 위안. 보는 이마다 해석은 다르겠지만, 내가 도달한 결론과 느낀 희망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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