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책과의 해후(邂逅)
<생의 한가운데>
2026.01.06. ~ 07.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바들을 온전히 설명하려면 장문의 글이 필요하겠지만 나의 두뇌적 능력의 한계로 어차피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핵심적인 감정과 판단은 분명하다. 이 책은 내가 살면서 읽어온 몇 백권의 책 중 어쩌면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일지도 모른다. 다 읽기 전에 도서관에서 반납해야 했던 순간의 아쉬움, 가라앉지 않던 흥분, 그리고 다음 날 망설임 없이 책을 구입한 선택 자체가 이 독서 경험의 밀도를 증명한다.
약 책의 200쪽 무렵까지 이 소설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통찰의 깊이, 인물의 생생함, 삶의 배열 방식과 서사의 구조까지 모두 정교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장이 인물의 성격과 사고에 정확히 귀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많은 소설은 옳은 통찰을 제시하지만, 그것들이 종종 특정 인물의 삶에 닿지 못한 채 추상적인 차원에서 공회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의 삶의 엉킴은 애달픈 감정을 설득력있게 전했다. 이는 단순히 삶을 포착하는 데 그친 관조적 서사가 아니라, 구조를 지닌 사랑 이야기였다. 중반을 넘어서며 나는 이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기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시대적 고증을 포기하더라도, 이 사랑의 구조만은 나의 언어로 다시 구성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러나 완독 후의 인상은 복합적이다. 분명 훌륭한 작품이고 재독할 의지도 있지만, 결말부에 이르러 서사의 견인력이 다소 약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는 의도된 선택일 것이다. 삶은 본래 무질서하며, 완결은 인간의 욕망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치밀하게 축적되어 온 감정과 질문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비교적 가볍게 흩어지는 듯한 느낌은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니나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판단과 결론, 그리고 떠남의 이유는 끝내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언니가 주소를 전해주고, 그 둘이 일정한 교감을 나누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니 마르그레트와 슈타인의 인식과 통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니나의 속마음은 끝내 서술되지 않는다. 우리는 니나가 입 밖으로 내놓았거나, 글로 남기기로 선택한 단어들을 통해서만 그녀를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생 그 자체이며, 누구도 그녀를 완전히 핀다운할 수는 없다.
이 책의 문장들은 내가 느꼈지만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감정과 사고를 놀라울 정도로 명확한 언어로 설명해 주는 듯했다. 그 설명의 정확성에서 오는 쾌감은 거의 계시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완독 후의 감정은 실망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그렇게까지 명백히 하던 작품이, 가장 기다렸던 지점에서는 말을 아끼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에 대한 답은 아마 이미 텍스트 안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이 책을 한 번 읽었을 뿐이고, 지금의 나는 이 응집된 통찰을 온전히 소화해, 명시되지 않은 결론을 읽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여러 번 읽어도 끝내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 자체가 이 작품이 허용하는 유일한 답일지도 모른다.
한편, 이 작품을 둘러싼 작가의 전기적 사실은 독서 경험에 불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반나치적 성향으로 알려졌던 작가가 실제로는 친나치 성향이었고, 이후 스스로를 반나치 인물로 재포장했다는 평가를 접했을 때, 나는 사후적인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런 글을 쓰는데 사실을 기만하고 거짓을 칠갑할 수 있다고? 혹시 후반부에서 감정의 밀도가 느슨해지는 지점은, 천재적인 영리함이 끝내 감당하지 못한 어떤 균열의 징후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그건 확신한다.
나는 니나를 통해 나 자신을 발견했고, 마르그레트를 통해 또 다른 나를 이해했으며, 슈타인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다. 한 인간 안에는 다양한 면모와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은 바라보는 이에 따라 여러 개의 자아 혹은 인격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문학에서 반복되어 온 익숙한 전제다. 나 역시 이 전제 자체에는 동의한다. 다만 최근 독서를 거듭할수록, 이 전제가 실제 작품들 속에서 얼마나 잘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지고 있다. 많은 소설 속 인물들은 지나치게 선명하고 단일한 성격으로 존재하며, 그 결과 다층적인 인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성향을 극대화해 분리해 놓은 도식적인 존재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 책 역시 나로 하여금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언니 마르그레트와 동생 니나는 표면적으로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인물로 배치된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선택과 삶의 태도를 취하는 듯 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태도들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느껴졌다. 이는 극단적으로 분화된 두 성격이라기보다, 하나의 인간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상반된 면모에 가깝다고도 느껴졌다. 니나와 마르그레트, 그리고 슈타인. 이 세 인물 모두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 사람 모두에게서 나 자신을 보는 듯한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이러한 인물 구성은 글쓰기라는 행위가 지닌 구조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가는 홀로 글을 쓰고,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인격을 인물들에게 나누어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서로 다른 이름과 역할을 부여받지만, 끝내 동일한 인식의 지평 위에 머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둘이 상반되는 듯 유사한 삶의 태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애초에 나의 세계 인식 대부분이 책을 통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 소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그처럼 첨예하게 삶을 직시하는 두 사람이 만난다는 설정 자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두 사람이 만났다면 그들의 관계성은 이렇게 발전했을 거라고 믿어지고, 그렇기에 소설로서 참으로 훌륭하고 진실되지만 말이다.
뛰어난 필치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교를 모방한다고 재현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자기 성찰과 축적된 통찰의 총량에서 비롯된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충분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여겨왔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 기준이 얼마나 느슨했는지를 실감했다.
서사 구조 또한 탁월하다. 현재는 며칠에 불과한 짧은 시간에 머물러 있지만, 과거의 기록과 수기를 넘나드는 구성, 그리고 슈타인이 그 기록을 쓸 때의 생생함과 자매가 읽고 있는 현재의 생생함이 겹겹이 쌓인다. 특히 자매가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함께 잠들고, 식사하고, 산책하는 등 일상적인 조각들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이야기는 드물다. 깊은 감정을 유도하게끔 조립되었지만 결과물에는 어떤 기만도 없다. 이 절묘한 균형이이야 말로sublime한 아름다움이라고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번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쁜 번역은 쉽게 감지되지만, 좋은 번역은 종종 투명해진다. 이 작품의 번역은 예외적으로 ‘좋음’이 느껴졌다. 따옴표 없이 오가는 대사, 구어와 문어가 예고 없이 병치되는 문체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곧 매료되고 말았다. 이는 원문의 문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불필요한 윤색을 거부한 번역가의 판단 덕분일 것이다. 원문을 읽지 않았음에도, 무엇 하나 유실되지 않았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야기의 내용과 문체가 너무나도 잘 어우러져서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