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전 슬며시 밝혀보는 나의 입장. 재밌기는 하지만...
내일이 오스카 시상식이지만, 그전까지 얼마나 정리된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내가 이 작품을 온전히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영화를 기본적으로는 좋아한다. 오락영화로서의 완성도와 장르적 효율성은 분명 높다. 2시간 40분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계속해서 집중하게 만드는 PTA의 연출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문제는 작품 자체보다, 이 영화에 부여된 과도한 의미와 평가가 오히려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특히 이 작품이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식의 해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평가는 영화의 성취를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작품이 감당하지 않는 정치적 무게를 덧씌우는 듯 보인다.
사실 주변에는 이 영화를 호평하는 사람 밖에 없어서, 감히 불호의 의견을 적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우연히 영화 잡지 FILO를 읽다가 장미셸 프로동의 아래와 같은 의견을 접하고 용기를 얻었다.
내가 위 평론가분과 동일하게 (저 분의 근거는 모르지만) 이 영화가 빈약한 정치적 진술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 록조의 팀이 어설픈 명분으로 불법체류자를 공격하는 설정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강경한 이민 단속 현실과 겹쳐 읽히며 ‘예언적’이거나 ‘시의적절하다’는 평가를 낳는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을 담은 것만으로 정치적 메시지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은 그러한 단속이 내포하는 제도적 폭력이나 갈등이라기보다, 록조라는 인물의 사소하고 유치한 동기에 더 가까워 보인다. 여기선 불법체류자 단속의 함의도, 그에 대한 입장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서사는 이를 사회적 쟁점으로 확장하기보다는, 사적 욕망과 공적 역할이 뒤엉키는 개인적 갈등의 차원에서 다루는 데 머무른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폭력과 만행이 실제로는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작동할 수 있음을 꼬집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다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작품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결국 아래에서 다루게 될 세 번째 논점으로 이어진다. 정치를 정치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그것을 이해관계나 탐욕의 충돌이라는 차원마저 넘어서는 지극히 사적인 심리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태도를 과연 훌륭한 정치영화의 성취로 평가할 수 있냐는 것이다.
둘째, 흑인 여성 캐릭터의 사용 방식은 이 영화의 한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들의 등장 비중이 높아 보이기 때문에, 작품이 일정한 입지를 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 서사의 초점은 끝까지 백인 남성 인물들의 취약한 남성성과 상처 입은 자존심에 고정되어 있다. 퍼피디아와 윌라는 독자적인 욕망이나 서사적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라기보다, 남성 인물들을 심리적으로 동요시키기 위한 기능적 존재일 뿐이다. 흑인 여성이 임신한 배 위에 총을 올리고 연사한다고 한들, 누가 그 장면만으로 쾌감을 느낄까.
이 영화는 두 백인 남성의 불안과 자아를 집요하게 해부하면서도, 흑인이나 여성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통찰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남성 중심 서사를 떠받치는 장식적인, 심지어는 페티시를 곁들인 장치일 뿐이다. 실제 현실의 권력 구조에서 가장 소외되는 집단일지도 모르는 흑인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부여하는 방식은 겉으로는 급진적인 인상을 만들어내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반복된 구닥다리일 뿐이다. 결국 이 작품은 남성성을 조소하고, 해부하기 위해서 흑인 여성을 전면에 배치했을 뿐, 그들을 주체로서 다루지 않는 모순된 태도를 드러낸다. 영화의 말미에서 윌라가 무전을 듣고 혁명을 향해 떠나는 장면은, 앞서 드러난 불균형을 수습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이 그동안 누적된 캐릭터 사용의 한계를 만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 이 영화를 진보와 보수를 동시에 겨냥하는 균형 잡힌 정치적 텍스트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내게 설득력이 없다. 이 영화가 취하는 시선은 전반적으로 보수적 감수성에 더 가깝다고 보인다.
밥 퍼거슨은 훌륭하게 설계된 설득력 있는 인물이다. 그는 취약한 남성성이 정치적 제스처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정치적 제스처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의 시위 참여와 조직 활동은 일관된 신념의 산물이라기보다, 존재적 불안함을 견디기 위해 개인이 집단 속으로 몸을 숨기는 선택에 가깝다. 밥은 집단이 제공하는 도취와 정의감의 환상에 잠시 매혹되지만, 그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퍼피디아의 임신 이후 그가 가정에 전념하려는 선택 역시 도피에 가까워보인다. 혁명이라는 위치가 애초에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대신, 그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명분 속으로 후퇴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취약한 남성성이 서로 다른 정치적 선택으로 분기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진보적 혁명 조직에 합류한 밥과 엘리트적 마초 조직에 편입되는 록조는 상반된 경로를 걷는 듯 보이지만, 그 출발점은 동일하다. 물론 둘 다 그 상반된 경로를 나아가며 처음에 택한 방향성을 체화하기에 이르고, 그것이 정체성의 깊은 일부가 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본질은 자신의 불안과 열등감을 감당하지 못해 집단 속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선택은 이념적 판단의 결과라기보다 상처 입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것처럼 제시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한계가 드러난다. 작품은 정치적 갈등을 끝내 취약한 남성적 자아의 문제로 환원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태도는 역사적 현실을 둘러싼 충돌이라기보다, 상처 입은 남성적 자아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연출하고 방어하는 전략처럼 보일 지경이다. 정치란 세계를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실천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선택하는 역할에 가까워진다. 물론 이또한 흥미롭고 유효한 진단이라고 생각한다. 강조하지만 훌륭한 통찰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훌륭한 정치적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두 명의 핵심적 인물이 다 백인 남성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정치적인 영화가 될 수는 있었겠지만, 그건 또 다른 영화일 테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는 정치적 갈등의 무게를 개인 심리의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 결과 작품은 정치 자체를 탈정치화한다. 공적 영역의 긴장은 인간 드라마의 소재로 전환되고, 사회적 현실의 충돌은 개인적 성장 서사의 장치로 소비된다.
결국 이 영화는 매력적인 오락 영화이자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다만 정치적 현실의 구조나 방향성을 사유하게 만드는 정치 영화로 평가하기에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사방에서 이 작품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신랄한지에 대한 찬양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반감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는 정치적으로 시급한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플롯으로 써먹을 뿐, 정치적 입장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탈정치화의 태도를 결국 보수적인 감수성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수작임을 인정하지만, 찬양에 대해, 또 사실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일정 수준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오스카 발표 전에 올리고 싶어서 후다닥 써내린 글은 일단 여기까지!
천천히 퇴고할 예정이나, 부디, 누구든지 반대의견이 있다면 나눠주신다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