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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0. 2022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의 입을 빌려 연출론을 말하다
<우리 선희>의 '문수'(이선균)는 헤어진 연인 '선희'(정유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한다. "내가 아마 죽을 때까지 영화만 만든다면 너에 관한거야." <소설가의 영화>는 선희에 관한 영화를 찍는 문수를, 그리고 김민희를 찍는 홍상수를 떠올리게 하는 다소 노골적인 자기반영적 영화다.
홍상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그의 삶과 다소 닮아 있다는 것은 이제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다. <소설가의 영화>는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지극히 상투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방식의 조언을 극중 인물인 준희의 입을 빌려 사뭇 날카로운 어투로 반박한다. 그리고 준희가 만든 영화를 통해 진정으로 '순수'한 형태의 이미지를 삽입했다는 점 에서 보다 노골적이라고 여겨진다. 작가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홍상수는 영화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극중 준희는 글을 영화로 쓴 사람이다. 그래서 <소설가의 영화>는 준희의 영화이기도 홍상수의 글이기도 하다.
소설가 '준희'(이혜영)가 서울을 떠나 근교에서 동네 서점을 운영하는 후배(서영화)를 만난다. 그녀는 서점 직원(박미소)에게 수화를 배운다. "해가 떠있지만 해는 곧 진다. 해가 떠있을 때 부지런히 다니자!" 티타임을 마친 준희는 홀로 그 지역의 관광 타워에 오른다. 때마침 우연히 그곳을 방문한 영화 감독(권해효) 부부와 껄끄러운 대화를 나누고 산책길에 만난 배우 '길수'(김민희)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함께 준희가 연출하는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함께 딸기 분식에서 밥을 먹고 다시 방문한 후배의 서점에서 술을 마신다. 시간이 흘러 준희의 영화가 극장에서 선 보인다.
준희는 하루 동안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순수'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 마다 예민하게 반응한다. 준희는 소설가로서 자신의 태도에 회의를 느낀 이후로 글을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의 아내(조윤희)가 말한 "그의 작품이 전보다 맑아졌다"는 식의 발언은 준희를 더욱 불편하게 할 뿐이다. 게다가 그는 (준희의 눈에는) 돈에 눈이 멀어 예술적 신념을 뒤로하고 제작자들이 하자는 대로 영화를 찍은 사람이 아닌가? 그들을 가증스럽게 여기던 준희의 분노는 우연히 길수를 만나 대화하던 중 폭발한다. 길수가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낭비하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며 유감을 표현하는 감독에게 준희는 "뭐가 아깝다는건데, 이사람은 성인인데, 자기들 인생이나 잘들 챙길 것이지..." 하고 타박한다. 길수는 그런 준희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멎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부부는 떠나고 남은 준희에게 길수는 "카리스마 있다"며 칭찬한다. 여태 "카리스마 있다"는 칭찬을 거부하던 준희는 길수의 말에는 기뻐한다. 준희의 눈에 길수는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만난 후배나 영화 감독 처럼 신념을 굽히지도, 숨어다니지도 않고 하고싶은 대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만큼 준희에게 순수는 중요하다.
딸기 분식에서 준희는 길수에게 글을 놓은 까닭을 설명한다. 아마도 영화 감독 부부의 '아깝다'는 발언은 현재 글을 쓰고 있지 못한 준희를 향해 "왜 글 안써?" 하고 묻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준희가 그들의 '아까움'을 위해 억지로 글을 써야만 하나? 어쩌면 순수한 태도는 준희 나름의 작법을 넘어 삶의 원동력이었던 것 처럼 보인다. 순수를 잃어가는 준희, 동력을 잃은 준희는 사람들을 만나 어떤 종류의 영감을 받고자 한다. 그리고 길수와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술자리에서 이를 밝혔을 때, 준희 옆에 앉은 선배는 영화에서 내용은 중요치 않다는 준희의 말에 반박한다. 이야기가 이야기 다워야 될 것 아니냐, 그러니 '이야기 답다'는 말이 있는거지. 그 말에 준희는 무엇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며 간단한 예시를 들고, 길수는 그런 준희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홍상수는 준희의 반박, 그리고 길수의 공감과 둘 사이의 유대를 통해 명백하게 자신의 감독론을 밝히고 배우 김민희와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 놓는다.
시간이 흘러 준희의 영화가 공개된다. 영화의 완성본은 준희가 바라는 어떤 순수의 결정체 같은 것들이 녹아있다. 이 때 화면은 흑백에서 컬러 VCR화면으로 바뀌고, 그 안에는 길수가 있다. "이 꽃 예쁘다...이거 흑백이에요? 아쉽다." 라고 말하는 그녀를 비추는 화면은 컬러다. 이 간극이 그가 '길수'가 아니라 '김민희'임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녀를 따라 투박하게 움직이는 화면은 마치 홍상수의 브이로그나 다름 없다. 투박함 뿐일지라도 비로소 준희의 영화는 만들어진 것이고 홍상수의 글은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