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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오잡 Jun 04. 2024

바둑돌

Sale e Pepe


여름이 되자마자 김주임에게서 연락이 왔다. 겨울에 일했던 레스토랑에서 만난 그는 퉁명스럽고 사나운 편이라 아래 직원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나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멀긴 해도 시급이 높았고 주 2회 또는 3회 출근이었기 때문에 흔쾌이 출근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테이블이 15개쯤 있었던 인테리어가 제법 비싸보이는 큰 가게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제 막 개업한 레스토랑은 '살레뻬뻬'라는 이국의 이름 때문이었는지, 아님 으리떵떵해 보이는 입구의 계단 때문이었는지 하품이 나올만큼 손님이 없었다. 이제 막 30살이 되었다는 사장님은 몇 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레스토랑을 차렸다고 했다. 얼마전까지 직장을 다녔다고,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업이라 기대도 포부도 컸던지 기분이 늘 좋아 보였다. 점심부터 장사를 시작했지만, 오후에 커피나 차를 겨우 잔 팔았고 저녁에 아주 잠깐 바빴다. 가끔 사장님이 안계실때면, 직원들은 가게가 흥하지도 못하고 망할거라는 저주 같은 걱정을 했다. 


직원은 나를 포함해 넷이었다. 정작 나를 불러온 주임님은 주말에만 근무를 했기때문에 내가 주말에 나오지 않으면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27살 여자선배가 있었고, 24살 남자선배가 있었다. 내 나이를 듣더니 모두 세 살 차이라고 다들 신기해 하며 웃었다. 언니는 자상하진 않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선배인 척 굴지도, 언니인 척 굴지도 않았다. 가끔 손님이 너무 없는 날에는 나를 주방 쪽으로 불러 세탁소에서 막 가져온 따끈한 냅킨 접는 것이나 스푼을 닦는 일 따위를 시켰고 끝나고 나면 손님도 없는데 좀 더 앉아 있으라고 두곤 했다. 말투가 차분한 남자선배는 정말 하얀 사람이었다.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핏줄이 보일만큼 투명한 피부에 똑똑해 보이는 금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선배와 나는 입구에 서서 손님을 기다렸다. 서로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말 없이 나란히 서 있기만 했지만, 지독하게 손님이 없는 덕에 우리의 수다도 점점 늘어났다. 선배는 세련된 외모와 빠릿빠릿한 성격이 무색할 정도로 자존감이 낮았는데, 가끔 탄식처럼 '나 같은 놈을 누가 좋아해.', '나 정말 시궁창이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때때로 전 여자친구가 보증금을 들고 잠적했다는 얘기와 여자친구가 있을 때도 짝사랑하는 것 처럼 외롭고 힘들었다는 얘기를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나는 피부가 까만편이고, 선배는 피부가 너무 하얀 편이었기때문에 사장님과 언니는 가끔 주방쪽에서 우리를 보며 바둑돌 같다며 놀렸다. 까맣다는 얘기를 들은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살면서 피부가 희다는 얘기를 없이 들었을 그는 매번 진심 섞인 짜증을 냈다. 


11시가 다되어 근무가 끝나면 버스가 끊길까 부랴부랴 집으로 가는 나와는 달리, 사장님과 정직원 둘은 회식을 하러 가곤 했다. 사장님이 오다가다 버스정류장 앞 무가지를 가져오면 두 손가락으로 신문지를 찢어내서 가장 적은 글자수를 찢어낸 사람이 그 날의 술값을 냈다. 다들 즐거워보여 따라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하루 일당에 맞먹는 택시비가 아까웠고 다음 날 수업도 걱정이었다. 재밌었냐고 물으면 맨날 보는 어른들끼리 노는 게 재미있어 봤자지, 같은 말을 하고는 또 다 같이 신문지를 찢었다. 


선배는 멍하니 언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선배가 말이 없어지면 그와 나란히 선 나도 언니를 바라봤다. 언니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간 적 없는 잦은 술자리가 끝나면 언니의 남자친구는 꼬박꼬박 언니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나는 그런 것도 못해, 차가 없어서.' 택시타라고 하고 싶었지만 택시 100대가 와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얀 얼굴로 할 줄 아는 운동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은 선배는 매일 한쪽 손목에 아대를 하고 다녔다. 꽤 많이 친해져 서로 적당히 놀려대며 지겨운 근무 시간을 흘려보내던 날이었다. 슬램덩크라도 본 거냐고 웃었더니 선배가 아대를 내려 손목을 보여줬다. '어때, 나 진짜 밑바닥이지.'하면서. 


자해의 흔적을 눈 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명확하게 손목에 그어진 세 줄.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다시 아대를 원위치 시켰다. 왜 그런 게 생겼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당부같은 잔소리를 내게 했던 것 같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과는 친해지지 말라고, 밑바닥에서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믿지 말라고, 인생은 이렇게 불공평한 거라고. 그 뒤로 선배와 무슨 말을 했는 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겨울이었고 학교에서 생긴 여러가지 일로 좀 지쳤기 때문에 나는 곧 알바를 그만두었다. 몇 개월 뒤에 김주임에게서 언니와 사장님이 연인사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뒤, 지나는 길에 살레뻬뻬가 아기사진전문점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레스토랑에서 일한 것은 그 곳이 마지막이었다. 

선배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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