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파리에서의 1년
사람들은 누구나 꿈꾼다.
인생에 한 번 쯤은 파리에서 살아보는게 어떨까?
나의 인생 첫 해외 여행지였던 파리에서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며,
꼭 여기서 살아봐야겠다라는 다짐을 했다.
그 생각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 불과 1년,
아마 무작정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을 돌이켜보면 '운명'이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프랑스 파리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나와 비슷하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 학생 비자로 몇 년간 공부하고 있는 부부,
벨기에인과 혼인하여 자녀를 키우고 있는 사람, 몇 년간 영화를 만들며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소르본 학생까지.
전 세계 어디에서 생활하든 인간 생활의 모습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즉, 어딜가더라도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삶이 다를 뿐 그 모습은 비슷하다.
여느 외국생활이 다 그렇지만 자신과 맞는 도시가 있다.
적응해 나가는 것은 두 번째 문제라는 것.
주변의 환경, 언어, 예술, 습관, 생활패턴 이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하던 것과 맞았다.
평생 내가 살고 싶었던 도시를 찾은 느낌이었다.
당시엔 대학생 신분으로 휴학을 하고 복수전공으로 프랑스어를 택했다.
아마 나의 원래 전공이 독일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만,
사실 기본적인 문법 이외에는 독일어를 잘 모른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 프랑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언어 문제에 봉착했다.
영어로 대답하자 많은 사람들이 쌩하며 지나갔다.
당시엔 아마존에 다녀와 복학을 준비하던 시점에 고민 끝에 복학하지 않고, 프랑스 행을 결정했다.
부모님께서는 한 학기를 다니며 교환학생을 준비한다면 지원해주시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프랑스 파리 7대학과 교환학생이 연결이 되어있어 지원하면 어렵지 않게
학업을 하러 갈 수 있었다. 약 4개월 간 1000만원의 비용이 든다라는 것을 보곤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자립해 생활해보기로 했다.
일가 친척도 생활할 곳도 없었던 프랑스 파리행의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내가 프랑스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언어가 되지 않고, 아는 사람이 없어 살 곳이 없고, 1년 간 무엇을 할지 정해지지 않았다라는 것이며
여비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프랑스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언어와 문화를 몸소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평생 없을 것이며,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과 힘이 나에게 있었으며, 1년간 무엇을 할지 현지에 도착해 정하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파리 출국 전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공모전과 강연을 하였고 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160만원을 들고 갔으나 아이슬란드에서 약 120만원을 사용해 40만원으로 프랑스 생활을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처음에 집을 구할 재간이 없어 호스텔에서 몇 일간 묵으며 구인 공고에 올라온 곳마다 올렸으며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 영어로 일할 수 있으며 프랑스어로 언어가 되지 않으니 최저 임금을 덜 받으며
일하겠다라는 이력서를 샹젤리제, 마레지구 등 관광지에 모두 돌리고 왔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해 기운이 빠졌다.
포기하지 않고 약 40여개의 이력서를 돌린 결과 프랑스 무역회사 한 곳과 LG 전자 인턴에 합격했다.
특히 LG 전자는 인터뷰도 보지 않았음에도 다음주에 출근이 가능한지 연락이 왔다.
이 일은 홍콩 관련 마케팅으로 영어로 업무를 해야했고, 프랑스 파리의 외곽 지역이었다.
고민 끝에 이 두 곳을 모두 가지 않고,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숙소를 제공하는 호스텔에서
프랑스 생활을 시작했다. 프랑스 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파리에 왔다는 원래의 목표와 의지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매일 아침 일어나 프랑스 파리 시내를 달리며 내일은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희망을 품었으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호스텔에서 일을 하며 언어 공부하는 것에 한계에 봉착했다.
그러던 중, 언어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어를 할 수 있는 프랑스 인 기욤을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라 불리는 오페라에서 기욤과 1주일에 2-3번 만나 프랑스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생활 프랑스어가 늘었고, 프랑스 레스토랑, 한인 마트, 전시 업체 기획,
불어 번역 등의 일도 할 수 있었고 프랑스 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생겼다.
해외에서 생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끔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 묻곤 하다
"한국인과 최대한 마주하지 말아야 언어가 늘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내 경우엔 해외에선 특히 사람을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궂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외면하거나
거리를 두지 않았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했다.
해외에서 생활한다면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오랜 해외 생활을 경험한 나에겐 특히 그 나라에서 의지할 수 있는 아지트가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
힘들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맥주 한 캔 들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 하나 쯤있다면
외국 생활이 외롭거나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학업을 했다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상상 이상의 경험을 했다.
실력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열정은 차고 넘쳤다.
닥치는대로 이력서를 넣고, 떨어지고, 일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 인과 만날 수 있는 자리이면 어디든 갔다.
덤으로 놀러온 많은 지인들에게 프랑스 파리를 속속들이 소개해 줄 수 있는 시간도 가졌다.
그런 열정과 진심들이 통했는지 나를 한달 쯤 지켜보던 호스텔 주인이 나에게
모든 돈 관리를 맡기기도 했다.
매일 새벽 달리고 아침을 준비하던 성실한 모습을 지켜본 것이었다.
"전에 일하던 사람들이 돈이 빈 적이 조금있다며 나에게 맡기고 싶다."라고 했다.
시간이 비기만 하면 오르세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것을 십 분 활용했다.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는데 박물관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건물 구도부터 작품까지 프랑스 인의 혼을 담은 느낌이었다.
여름에 휴가를 가지 못하는 파리지앤들을 위해 세느강 근처를 해변화한 파리플라쥬.
옆에 앉아있는 사람과 시시콜콜하게 자기소개를 하며 농담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프랑스에선 안해본 일 없이 생활비를 벌기위해 노력했다.
새벽 청소, 판촉 행사, 1억이 넘는 작품을 들어서 옮기는 전시회 아르바이트, 파리패션위크 디자이너 조수,
에어비앤비 관리 아르바이트, 레스토랑, 외교부 해외통신원, 독립영화 출연 등 몸을 쓰고 말할 수 있는 곳
어디든 달려갔다.
운명처럼 살았던 2015년 프랑스 파리에 작은 아쉬움을 남겨두고 왔다.
4년의 시간이 지나 길, 사람, 풍경 어느하나 변한 것 없는 파리에 휴가를 갔다.
길지 않은 시간 한 도시에 살며, 나이가 들어 여생을 보내고 싶은 도시들이 생겼다.
누군가 허상이라며, 현실을 보라며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파리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며,
남겨두고 온 작은 아쉬움을 찾으러 다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