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의 첫인상
꿈에 그리던 이 곳에 첫 발을 내디딜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탈 것이란 탈 것은 모두 타 본 듯한 장기간 이동이 원인인지 온통 까만 세상 때문인지 지금 여기 왔다는 사실보다 허기를 달래줄 음식과 쉼을 위해 기댈 곳이 필요했다. 21시. 바라하스 공항이라는 여러 번 되뇌어 봐도 입에 익지 않는 이 곳에 도착했다. 나의 공간이 없는 이 곳에.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과의 무리에서 이탈했나 보다. 주변에 얼마 없는 사람들 중 한국 사람이라고는 나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 곳에서 숙소를 잘 찾아갈 수 있을까... ’ 순간이었지만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실감했다.
한 손엔 보드를, 남은 손으로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파마머리 남자가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고 그에게 묻지 않으면 꽤 오랜 시간 사람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 시간만큼 내 용기도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빨리 숙소에 가고 싶었고 쭈뼛쭈뼛할 시간이 없었다.
-Sol역에 가고 싶은데 이 기차가 맞아?
-맞아. 아토차 렌페 역에서 내려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될 거야.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피던 담배를 피우고 나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 휴대폰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며 그와 떨어져있었다. 나는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앉아있던 벤치의 옆에 앉았다. 낯선 모습에, 심지어 담배를 피고 있던 남자라도 그때 내겐 숙소 가는 길을 알려준 사람. 가장 필요한 것을 알려준 고마운 사람. 지금 생각해 보니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무심한 듯 보였지만, 열차가 오고 내가 타지 않을까 신경 써주던 모습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를 따라 몸을 실었다. 텅텅 빈 열차 안 많고 많은 자리 중 남자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지날 때마다 긴장감은 커져만 갔다. 창밖으로는 깜깜해진 밤이 존재했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을 관찰했다. 그는 보드를 의자에 기대어 세워두고 배낭에서 책을 꺼내 한동안 책을 읽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이 지났다. 배낭에서 펜을 꺼내 읽던 책에 꽤 오랜 시간 무언가 끄적이더니 다시 펜을 입에 물고 책을 읽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내려야 할 역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많은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했고, 그도 읽던 책을 덮고 내릴 채비를 하더니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여기에서 내려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고맙다고 답했다. 마주한 눈에 고마움을 듬뿍 담은 채로. 그는 내가 만난 첫 스페인이었다.
큰 걱정 없이 출발한 마드리드행이지만, 숙소까지 크고 작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길을 헤매다가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데 옆에서 어느 스페인 남자가 말을 건네 왔다. 한국어를 꽤나 잘 하는 분이었고 기회다 싶어 숙소를 물었다. 감사하게도 그분은 숙소까지 길을 잘 안다며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양하고 그가 가리키던 방향, 지나왔던 골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길에 숙소가 있었다. 드디어 그날 밤의 긴장 끝, 숙소 도착.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 사람들은 오지랖이라고 오해받을 정도로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분 역시 전형적인 스페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날 선 경계심. 내가 이방인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는 내가 만난 두 번째 스페인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안도감과 함께 이 곳에 도착해 만난 두 사람이 떠올랐다. 고마운 감정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토록 꿈꿔오던 스페인이었다. 한동안의 머묾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나라 속, 외로운 여행자라는 사실에 작아지는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웃는 표정에, 친절한 말에 내 순간들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원래 좋아하던 이 곳에 대해 '역시 스페인'이라는 생각을 심어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밤이 더욱 익숙했던 한국에서의 생활과는 반대로 이 곳에서는 한국에서 바래왔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내 잠에 취해 왔음에도 숙소에 도착해 씻고 베개에 닿자마자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알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꿈뻑꿈뻑.
그때서야 이 모든 사실이 놀라웠다.
내가 이 곳에 왔다니
내가 이 곳에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