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금 모으기

작은 은퇴엔 너무 큰 자금까지는 필요 없다.

by 해일

나는 2010년 11월 첫 회사에 입사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25년 10월, 퇴사를 앞두고 있다. 아내 역시 20년 가까이 근무한 후 내년 초 은행을 떠날 예정이다. 우리 부부 모두 금융권에서 일해왔기에 일찍부터 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아내는 은행에서 일하는 만큼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나는 증권사에 있다 보니 조금 더 공격적인 투자를 선호했다. 하지만 여의도라는 환경 속에서 보자면 내 성향조차도 한참 보수적인 편이었다.


일한 기간이 결코 짧지 않지만, 그렇다고 은퇴를 말할 만큼 길지도 않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은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주변에서는 종종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과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준비한 은퇴는 파이어족과는 다르다. 파이어족이 연 지출액의 25~30배를 모아 완전한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은퇴는 열심히 일한 스스로에게 주는 휴식이자, 다음 삶을 준비하기 위한 갭이어(Gap Year)다. 그래서 우리는 연 지출금액의 3~4배 정도면 충분히 첫 번째 은퇴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금이 많을수록 안정감은 커지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아도 더 큰 돈을 원하게 마련이다. 결국 기준을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끝없는 욕심에 휘둘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내가 희망퇴직이 가능한 나이인 만 40세를 은퇴 시점으로 정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나는 작고 수중한 월급에 나가는 세금조차 아까워, 첫 월급을 받자마자 연금상품과 보험에 가입했다. 그렇게 15년간 꾸준히 월 40만 원을 납입한 연금은 어느새 1억 원 가까이 쌓였다. 이직 과정에서 받은 퇴직금도 건드리지 않고 IRP 계좌에 모아두었더니, 지금 회사에서 퇴사하며 받게 될 퇴직금까지 합쳐 약 1억 원이 조금 넘게 마련되었다. 아내는 나보다 더 많은 금액을 연금에 납입해왔고, 일한 기간도 길어 우리의 노후는 크게 불안하지 않을 듯하다. 개인연금은 55세부터 수령할 계획이니, 이제 남은 15년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잘 계획하는 것이 관건이다.


2015년 결혼할 당시, 우리는 각각 5천만 원가량을 모아 작은 빌라와 혼수를 마련하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오래하지 않았던 탓에 연봉도 크지 않았고, 학자금대출이나 가족을 위한 지출도 있어 여유 자금을 넉넉히 쌓기는 쉽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아이없이 맞벌이를 한 덕분에 돈이 모이는 속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욕심으로 주식에 빚까지 끌어들여 투자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 1년간의 저축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경험도 했다. 다행히 아내는 침착하게 “우리 돈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자”며 위로해주었고, 대출을 갚기 전까지는 주식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로는 증권사에 다니면서도 예·적금만 하며, 투자보다는 연봉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대출을 모두 갚았을 때쯤 내가 딴 생각을 못하도록 하려는 건지 아내는 다시 이사를 가며 새로운 대출을 늘렸고, 전세금 인상으로 어쩔 수 없이 빚이 커지기도 했다. 그 덕분에 코인 열풍이나 동학개미운동 같은 흐름은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지나갔다. 다만 직업 특성상 금융시장을 늘 지켜보며 기회가 올 날을 기다렸다. 결국 2022년 대출을 모두 상환한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여유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나는 비로소 다시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해외주식 열풍이 이어졌지만 주식에서만큼은 쇄국정책을 지향하여 잘모르는 해외주식보다 국내주식만을 고집했다. 그 결과 큰 수익률은 아니었지만, 코스피·코스닥 지수보다는 나은 성과를 내며 재미를 보았다. 은퇴 후에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해외 주식 공부도 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만 40세 은퇴를 앞두고, 전세자금을 제외하더라도 연 지출금액의 3~4배에 해당하는 여유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완전한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에는 부족하지만, 휴식과 갭이어를 보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는 충분한 금액이다.



예상보다 여유 있는 자금이 모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만 40세의 첫 은퇴를 선택했을 것이다. 돈이 부족하다면 여행이나 쉬는 기간을 줄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다. 여의도에서는 지금 당장 은퇴해도 충분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묶여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자주 본다.

우리는 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부족하다면 부족한 대로, 그 안에서 만족을 찾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