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딸이 아니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딸이 아니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딸이 아니게 되었을 때
목사님의 자녀, 어렵게 낳은 무남독녀, 부모에게 장애가 있어도 구김 없이 자란 밝은 아이, 아픈 부모를 위해매주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착한 딸. 누군가의 딸이라는 수식어로 설명되던 나는, 어느 날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 아니게 되었다. 그저 ‘딸’이라는 이름표 하나를 떼어냈을 뿐인데 나는 너무 쉽게 무너져 내렸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상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온 뒤 여러 날을 무너진 채 그저 존재했다. 누군가의 빛나던 딸이 사라진 자리엔 상실을 이기지 못한 공허한 영혼만이 남아 하루하루를 죽여갔다. 쇼핑, 영상, 활자에 기대어 현실을 지웠다. 우울에 잠식되어 무기력했고,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으나 죽을 용기조차 없어 유서만 잔뜩 써 내려갔다. 계절이 몇 번이 바뀌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음이 왔다. 딸이란 포장지를 벗겨내고 남은 것. 이것이 진짜 ‘나’ 였다는 사실을.
딸로 살아간다는 것은, 특히 몸이 불편한 부부의 외동딸로 자란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누구도 내게 '착한 아이'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는 부모님에게 효도하기를 기대했다. 나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스스로 '착한 아이'가 되기를 '선택'했다. 적어도 그땐 그것이 나의 선택이라 믿었다.
엄마는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았고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단정한 옷차림, 바른 행동거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모범생. 친구와 옷을 사러 가서도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여줬고, 머리의 길이까지도 엄마와 의논했다. 엄마의 '보기 좋네. 잘했어'라는 평가가 있어야 옳은 선택을 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일상 속에 엄마의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히지 않으면 불안했다.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장애를 가진 불쌍한 엄마의 보물이자, 엄마가 놓쳐야 했던 날들에 대한 보상이었으니까.
그런 우리의 관계는 내가 성인이 되어 엄마 품을 떠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울로 상경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10대의 착한 딸은 떠났다. 20대의 달라진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와 더 이상 엄마의 착한 아이로 살지 않기로 결정한 나 사이의 전쟁이자 투쟁의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는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바꾸고자 수많은 감정들을 서로에게 던졌다.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종결시켰다.
우리가 걸어온 갈등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는데 길 위에서 엄마는 홀연히 떠나버렸고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남겨진 나는 '진짜' 1인 가구가 되었다. 홀로 산 기간이 꽤 길었기에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크게 잘 와닿지는 않았다. 흔히들 외로우리라 생각하는 엄마아빠의 기일이나, 내 생일, 명절 같은 특별한 날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에겐 여전히 나를 돌아봐주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다만 전혀 엉뚱한 부분에서 '진짜' 1인 가구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핸드폰의 가족결합요금을 권하는 말을 들었을 때, 주택청약 신청 시 소득을 반영할 부모님이 없어 순위가 높아졌을 때, 가족관계서 서류에 덩그러니 하나만 남은 이름을 보았을 때, 그럴 때가 돼서야 나는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 역시 나를 슬프게 하진 못했다. 혼자가 된 것이 사무치게 슬픈 때는 따로 있었다.
엄마가 남긴 상처를 마주할 때, 내 안의 근원적인 불안과 우울이 엄마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원망할 상대를 찾지 못한 분노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 나는 혼자 남겨졌고,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도 여전히 갈 곳을 찾지 못했다.
'딸'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이름을 놓지 못하고 길 위를 헤매고 있다. 그래서 여기,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들을 기록하며, 나를 찾아가 보려 한다. 이것은 누군가의 딸이 아닌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페이지이자 그 길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