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지

by 아침이






대학교 2학년, 지구 반대편 나라로 해외 봉사를 갔던 적이 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한 살 어린 후배와 같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 애가 문득 말했다.


"언니, 나 엄마 보고 싶어"


나는 별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엄마? 집에 가면 볼 수 있잖아?"


예정된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있을 엄마를 왜 그리워하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현지 의료인 선생님께서 웃으며 말했다.


"아침씨 어머님은 늘 집에서 기다려 주셨나 보네요. 집에 가면 어머니가 계실 거란 믿음이 있는 걸 보니"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후배는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 학교를 마치면 엄마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고, 나에게 엄마는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무의식이란 그런 것일까.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가끔씩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엄마의 장애는 아주 어릴 적 후천적으로 생긴 것이었다. 갓난아기였던 엄마를 이모가 업고 있다 실수로 떨어트리면서 엄마의 등뼈가 안쪽으로 휘었고, 그로 인해 심장과 폐를 누르는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엄마는 누구보다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점심이면 밥과 국, 반찬을 큰 쟁반에 담아 길가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에게 나눴고, 일상을 적은 글과 시를 투고하며 작가의 꿈을 꾸었다. 엄마에게 장애란 남들과는 달리 영원히 자를 수 없어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처럼 그저 조금 불편한 일에 불과했다.



장애도 꺾지 못한 엄마의 그 열정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했다. 유치원 시절 아침마다 어린이 프로그램인 '뽀뽀뽀'에 나오는 애들의 머리모양을 유심히 보고 나에게 똑같이 만들어 주는 게 엄마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아침의 즐거움은 도시락을 싸고 다니게 될 무렵에는 도시락 통 안에 매일매일 엄마가 적어주는 사랑이 담긴 성실한 쪽지로 이어졌다.



엄마가 많이 아프기 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의 우리의 기억은 푸르고 맑다. 손바느질로 내 첫 돌 한복을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던 엄마는 음식 솜씨도 참 좋았다. 엄마가 끓여주던 맑은 국물의 소고기 미역국, 생일이면 오븐에서 만들어 준 피자, 학교가 끝나고 돌아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고구마튀김, 엄마랑 같이 반죽하며 만들던 도넛이 남겨준 기억은 처음 맛본 달콤한 행복의 맛이었다. 한때는 엄마와 같은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시절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토록 엄마는 나에게 정성이었고 나 역시 그런 엄마가 좋았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까?


어릴 적 나는 평범한 집안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때때로 슬펐다. 엄마와 손을 잡고 길을 걸을 때면 우리를 향하던 낯선 시선들. "아줌마가 진짜로 이 아이 낳았어요?" 무례한 질문에도 엄마는 당당히 말했다. "네 제 배 아파서 낳은 우리 딸이에요 예쁘죠?" 어린 마음에도 당당한 엄마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시선들이 못내 부끄러웠다. 무례한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착한 딸이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엄마는 없고, 남겨진 사람은 나뿐이다. 엄마 그때 아프지 않았어? 하는 질문을 받아 줄 사람은 이제 없다. 갈 곳 없는 물음들만이 여전히 이 길 위에 남아있다. 언젠가 이 여정 속 어딘가에서 후련함을 마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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