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만이 눈물을 흘린다

효자는 울지 않는다

by 아침이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불효자는 운다고.


외삼촌은 효자이자 불효자였다. 외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삼남일녀 자녀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막내아들인 외삼촌은 공부를 곧잘 했고 관세대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해 세관공무원이 되었다. 안정적인 직업을 얻은 삼촌은 보통의 효자들이 그러하듯 평생을 고생하신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할머니는 한평생 삼촌바라기였다.


효자인 삼촌에게 불효자라는 불명예 딱지가 붙게 된 데에는 불 같은 성격이 한몫을 했다. 할머니는 삼촌의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이 있으면 '더 먹어라' 하고 그쪽으로 그릇을 밀어주곤 하셨는데 삼촌은 그 손길을 두 번은 참아도 세 번째에는 그냥 두라며 꼭 화를 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삼촌은 종종 그때를 떠올리며 ‘그게 뭐라고 왜 그렇게 짜증을 냈는지 모르겠다' 하고 후회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삼촌, 할 수 있었다면 그때 이미 다 받아 줬을걸. 삼촌 성격상 할머니 다시 살아 돌아오셔도 똑같이 또 그럴 거야. 후회하지 마.‘ 그러면 삼촌은 아니라고 못하고 ’허허 그런가 ‘ 하고 웃고 마신다. 불효자는 운다. 돌아보면 많은 것들이 사무치며 후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효자는 울지 않는다.





나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할머니께서 너는 참 조용하고 순해서 버스로 이모, 삼촌 집을 데리고 다녀도 얌전하게 있었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학창 시절에도 별 탈 없이 학교와 학원을 착실히 오가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돌이켜 보면 엄마가 바라던 효도는 그때 이미 충분히 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스무 살,


새로운 차원의 투쟁 같은 효도가 시작됐다. 장애로 인란 합병증으로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진 엄마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 나는 아픈 엄마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썼고 잘못한 게 없어도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일상이 됐다. 부채처럼 쌓이는 엄마의 서운함에 숨이 막혔지만 벅차다 말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감정적으로 엄마의 엄마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도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엄마가 절실히 필요했었다. 익숙한 작은 세상 속에서 떠나 대도시 서울과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건 무척이나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나는 내 감정을 죽여가며 엄마의 감정을 보살폈다. 참 오랫동안.


그러나 눌러둔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한계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나를 깎아가며 하던 효도의 결과는 만성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병든 영혼이었다. 자기 살을 베어 부모에게 먹였던 전래동화 속 어떤 효자처럼 나는 내 마음을 깎아 엄마의 외로움과 슬픔을 달랬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를 엄마에게 주었으니까.


엄마는 어땠을까. 우리의 마지막 기억은 추석에 별 것도 아닌 일로 크게 다투고 홧김에 내가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 버린 일인데 그런 나에 대한 서운함을 품고 떠났을까? 아니면 이제라도 내 마음을 떼어먹으며 위로를 받았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엄마는 후회할까? 엄마의 마음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엄마의 영혼은 하늘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을 테니 이제는 내가 나를 돌보며 잘 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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