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에서 A급이 되고 싶어졌다.
21. 너의 향기가 나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너는 없어
우리는 삶을 살며 경험하는 일들을 머릿 속에 저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기억을 꺼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아주 큰 창고처럼 생긴 카테고리에 맞추어 분류된 기억의 상자들을 열어 열심히 서류들을 헤집고 꺼내어 떠올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가끔 우리는 강렬하게 경험한 일을 기억에서 꺼내야 할 때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곤 한다. 그러한 경험은 마치 '스위치'처럼 저장이 되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바로 떠올라 봇물처럼 쏟아낼 수 있게 저장된다. 그런 '스위치'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에 더 가까우며, 대개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특징적인 점을 감각적으로 찾지 못했다면 다음 번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기억을 연관짓기 어려워진다. '업무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회사'라는 기억의 카테고리를 뒤져 그 때 그 사람이라고 유추하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의 시각적인 부분이 너무 강렬했다면, 혹은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 '목소리가 좋은 사람'임을 경험했다면 그 다음은 그 시각 혹은 목소리의 스위치 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감각의 스위치'는 자극적인 경우가 많아 한 번 경험하게 되면 쉽사리 잊히지 않고, 그 여운이 제법 오래 가는 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후각이 만들어내는 스위치가 제법 많았다. 그리고 그 후각이 만들어 낸 스위치의 강력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나 또한 그런 장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향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런 이야기를 제법 듣게 되었다.
"너한테서 나는 향이 너무 좋아서, 기분이 이상해져."
* '조말론'의 얼그레이 커큠버, 라임바질 앤 만다린, 다크앰버 앤 진저릴리, '딥티크'의 필로시코스, '조말론'의 머르앤통카
* 가로수길 편집샵 '메종 드 파팡'의 오토포트레이트, '톰포드'의 네롤리 포르토피노, '바이레도'의 집시워터, 발다프리크, 모하비고스트, '프라고나르'의 세드르
* '펜할리곤스'의 주니퍼슬링, 엔디미온, 블렌하임부케, '아쿠아 디 파르마'의 아란치아 디 카프리, 콜로니아 에센자
처음부터 향수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 때 나는 그저 엄마가 세탁해 준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기와 집에 항상 있는 샴푸와 바디워시를 적당히 쓰는 그냥 20살 남자애 그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도 어김없이 첫사랑은 봄바람처럼 불어왔고, 그 왜인지 모를 가슴 뜀과 설렘으로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을 했다. 상대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사람이었고,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술을 잘 못 마셨던 내가 그 취기 때문에 어지러워할 때면 '많이 마셨구나?'하며 어깨를 잡아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술 기운에 취해있을 때 어깨에 얹어진 손 근처에서는 언제나 좋은 꽃 향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멀리서 쳐다보는 것을 못 했던 나는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는 것을 몇 번이고 실패했고, 결국 썸과 비슷한 것을 타기 시작했으며 단 둘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나는 술을 성인이 되어 처음 접했기에 잘 하지 못했고, 특히나 독한 의료용 솜이 잔뜩 머금었을 법한 그 소주의 맛은 너무도 써서 한 잔 마시면 물을 두어 잔이나 들이켰었다. 익숙하지 않은 술과 제법 낯선 분위기, 그리고 혼란스런 취기에 나는 휘청거렸고, 또 어김 없이 손이 다가왔다. 그 날은 어깨가 아니라 서로의 손 근처였지만.
지방에 있었던 나는 버스가 빨리 끊겼기에 우리는 버스를 타기 위해 10시면 헤어져야 했고, 그 날은 술로 인해서일지 아니면 그 날의 분위기가 좋아서일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제법 긴 숨을 내쉬었던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그리고 안았을 때 목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아서, 나는 기분이 야해졌고 내 머릿 속에는 스위치가 생성되었다.
그 스위치라는 것은 이후에도 제법 많이 작동하여 유사한 냄새만 맡아도 주변을 두리번 거리게 만들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백화점 1층 향수 매장에서 그 꽃 향만 맡게 되면 머릿 속에서는 그 날의 장면이 떠오르게 되어 언제나 쾌적한 온도였을 백화점에서 혼자 땀을 삐질 흘리게 되기도 했다.
그 날의 향에 취해 만들어진 스위치는 강렬했고, 성인이 되어 느끼는 그 솔직한 감정은 제법 자극적이었기에 한동안은 꽤 탐닉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탐닉과는 별개로 그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내가 그 향을 그렇게까지 가까이서 맡았던 것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 첫 사랑 이후 나의 감각의 스위치는 다른 것들보다 제법 '향기'로 많이 생성되었다. 소개팅이나 미팅을 했을 때에도 좋은 향이 나는 사람에게 감각적으로 좋은 감정을 받았고, 반대로 담배냄새와 같은 불유쾌한 향취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크게 느꼈다. 그런 기준은 남들에게만 엄격하게 작용하는 잣대가 아니었기에 나 또한 나에게서는 항상 향이 나기를 바라게 되었고, 처음으로 향수 매장을 들러서 나를 위한 향수를 구매하게 되었다.
2015년 나는 교환학생을 유럽으로 가게 되었고 그 유럽에서는 니치향수라고 부르는 브랜드들도 제법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타국에서 생활을 하는 8개월 동안 3개의 향수를 구입했고, 이후 한국에 귀국 하고서부터도 여행을 갈 때마다 면세점에서 하나하나 사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너 향수 많은데, 또 사?"
"응, 매 여행지에서 사는 게 다 달라져."
그 감각의 스위치는 향으로 내가 직접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행지를 갈 때마다 새로이 샀던 향수들이기에 그 향수를 지그시 보면 여행을 가는 그 당일 출국장에서부터 설레하며 향수를 챙기던 순간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호텔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고 단장을 다시 하고 새로운 향수를 몸에 입었을 때, 그 향과 함께 창문을 열고 맞이하는 그 풍경이 떠오른다.
"이 많은 걸 다 뿌리기는 해?"
"계절, 입는 옷, 내가 연출하고 싶은 분위기에 따라서 다 다르게 뿌려서 골고루 뿌리지."
향수라는 게 참 그랬다. 향마다 가진 향취가 사람에게 직접 닿았을 때 그 감성이 다르고, 저마다 느끼는 향의 취향도 달라 누구에게나 맞는 향수라는 것은 없었다. 같은 계열의 향수라도 어떤 것은 무겁고 어떤 것은 또 가벼워 주고 싶은 느낌을 다르게 연출할 수 있었다.
그런 연출은 어느 새 일상이 되어 이제 향수는 가장 마지막에 입는 옷이 되었다. 이따금 향수를 깜빡하고 출근 하는 날에는 무언가 발가벗겨진 느낌으로 나가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입고 있는 옷에서 불쾌한 향이 나는 건 아닐까 신경 쓰이기도 하였다.
또 한 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 일을 하다가 휴대전화를 떨어뜨렸고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너무도 달달한 향이 나서 고개를 드니 내 코 위치에는 내 손목이 언제나 닿는 마우스패드가 있었다. 그 많은 향수들이 콜라보레이션 되어 있는 그 지저분한 마우스 패드가 어딘지 모르게 나를 비추고 있어 머쓱해졌다.
"향이 너무 좋아서, 더 안고 있을게."
"향수 이상하진 않아?"
"아니, 너무 좋아서 안고 싶었어."
그 이후에 연애를 할 때에 향수에 제법 신경을 썼던 터일까, 술을 한잔 마시고 같이 껴 안고 있는 그런 날에는 곧잘 이런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그렇게 나의 향은 누군가에겐 '스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주변에서 그 향이 난다면 다들 한 번쯤은 돌아보고 또 나와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나를 거쳐갔던 그 누군가 중 한 명은 그러겠지.
"근데 너는 왜 그렇게 향에 신경 써?"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복잡한 감정을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 지 몰라 적당히 얼버무렸다.
"향은 쉽게 잊혀지지 않아서 그런가봐."
시각은 우리가 언제나 보는 것이 많기 때문에 쉽사리 덮어버리기 쉽다. 같이 어디를 갔던 경험도 다른 사람과 함께 간다면 쉽게 덮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향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에게 향을 덮어 씌운다해도 어울리지 않을 수 있고, 그 때의 그 향이 아니기에 뭔가 기분이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과거를 덮으려고 향으로 시도하는 사람도 없고, 그 사람에게 억지로 어울리지 않는 향을 부어버릴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향수는 부으면 부을수록 더 진해지고 독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