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 안,
2017년, 학교를 합격하고 다른 미대와 달리 우리 학교는 비교적 높은 어학 점수를 요구했기에 1년 입학 유예를 했었다. 유예 기간 동안 한국에 있었는데, 나의 첫 도시이자 2년 반 살았던 베를린을 떠나기 전 모든 짐은 베를린의 창고센터에 맡겨놓았다. 2018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 학교가 있는 새로운 도시에 자리를 잡고 입학 전 1박 2일로 베를린에 가서 창고에 있는 모든 짐을 다시 쌌다. 8개의 무거운 박스를 택배로 부쳤다. 창고센터와 짐 부치는 곳이 가깝지 않아서 왔다 갔다 땀을 삐질 흘리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렇게 진절머리 나게 모든 힘을 소진하고 탈진한 듯 베를린을 떠났다. 그게 마지막 베를린의 잔상이었다.
어쩌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나버린 것일까?
잠도 많이 못 자고 나왔는데 졸리지도 않고 미묘한 울렁거리는 마음에 작은 수첩을 꺼낸다.
요즘 그리고 싶은 것들, 몇 달 동안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둥둥 떠다녔던 것들을 끄적여본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에서 해가 일어나고 지는 모습, 미세한 빛의 조각들이 물결에 내려앉는 그림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이 테마로는 이렇게 작은 조각의 그림을 많이 그리지 않을까 싶다.
2박 3일의 짧은 베를린 여행이긴 했지만, 놀랄 정도로 사진이 거의 없다. 2월 말의 베를린은 프랑크푸르트보다 추웠고 흐렸다. 옷을 잔뜩 여미고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거리를 걸었었다. 두 번째 날에는 2개의 문구점을 들렸는데 기대했던 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R.S.V.P Papier in Mitte에는 모든 카드나 노트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종이에 쓰여 있었는데 그게 되게 좋았다. 나는 문구류를 좋아해서 나중에 시즌제로 상점을 열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여긴 Nibs Cacao라는 스페인 츄러스 집. 스페인을 안 가봐서 원래 본토 맛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저 그랬거든.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자주 먹던 츄러스와 굉장히 다른 것에 의의를 두는 것으로...
츄러스는 안 찍고 빨간 테이블 위에 꽃만 찍었다. (킹받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를 다니던 기차역으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뮤지엄이 된 함부르크 반호프 뮤지움.
이우환 작가의 회고전을 보러 다녀왔다. 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보기를 너무 잘했다. 정말 좋았는데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글로 정리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파란색의 전시도록도 사서 나왔다.
이튿날 저녁, 밥 먹으러 가는데 새들이 무리를 지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함께 날아다녔다.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 일사불란하게 다양한 모양으로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초록색으로 바뀐 지도 모르고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의 합동 훈련인가? 웃기게도 베를린에서 제일 기억에 남은 장면.
다음 날 일해야 해서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오후 한 시 티켓.
마지막 날은 11시쯤 체크 아웃 후, 따뜻한 쌀국수 한 그릇 먹고 베를린 중앙역으로 갔다. 남은 시간 동안 기차에서 읽을 잡지를 사고 도넛과 커피도 샀다. 기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내내 우중충하고 흐렸던 날씨에서 해가 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창가의 빛은 기차 안에 가득하다. '당신의 반신욕을 위한 6가지 완벽한 길잡이' 잡지의 글자들도 빛이 난다.
베를린을 생각할 때면 이상한 멜랑꼴리가 섞인 그리움이 늘 잔재해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의 마음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부유하듯 떠돌이처럼 살다가 나도 모르게 이곳이 집이 되버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