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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Jan 08. 2019

각인된 폭력과 상처

교육은 폭력이 각인되는 과정, 상처를 묻어두는 과정


    어린 시절 길을 가다가 목격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골목에서 한 여자 아이가 울고 있었고,  부모로 보이는 어른이 옆에서 계속 괜찮다고 아이에게 말하고 있었다. 추측해보건대 아이가 소변이 급한데 주변에 화장실이 없어서 엄마가 그냥 골목 길가에다가 소변을 누게 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아이는 괜찮다는 엄마의 말에도 계속 울기만 했고, 결국 그 아이의 옷은 다 젖고 말았다. 이 아이는 도대체 왜 치마를 내리고 길가에 소변을 보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하다가 결국 옷을 버리게 되었을까.


# 교육은 폭력이 각인되는 과정, 상처를 묻어두는 과정


   이 아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교육에 대한 강력한 이론 중 하나인 ‘행동주의’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것 같다. 지금도 교육현장에서 강력하게 활용되는 이 이론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파블로프 개’ 이야기와 관련된다. 내용은 간단하다. 고기를 보여주면 개는 침을 흘린다. 이를 무조건 반응이라고 하는데, 이것과 함께 종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몇 번만 반복하다보면, 개는 종소리만 들려도 침을 흘리게 된다. 행동주의에서는 이를 ‘학습’되었다고 말한다. 끔찍하게도 동물의 훈련에 쓰이는 이 방식이 아직까지도 인간의 교육에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너무나 손쉽고 효과가 강력해서 교사들은 쉽게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사는 손쉽게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보상을 주어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아이들을 ‘학습’시키고, 아이들이 싫어하는 ‘벌’을 제공하여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그 행동을 못하게 ‘학습’ 시킨다.


   이왕 개를 대상으로 훈련한 것을 바탕으로 출발한 이론이니 또 개가 대소변을 가리게 되는 과정을 예로 들어 보자.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개는 우리보다 40배나 뛰어난 후각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개는 자기가 과거에 대소변을 본 곳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그리고 거기에 대소변을 다시 눈다. 그런데 애완견이 아직 대소변 훈련이 되지 않아서 거실 바닥에 소변을 눴다고 생각해보자. 주인이 그것을 닦아낸다 할지라도 개에게는 여전히 냄새가 난다. 그래서 그곳에 다시 가서 소변을 눈다. 주인은 소변을 다시 닦고 이번엔 탈취제를 그곳에 뿌린다. 인간의 40배의 후각능력을 가진 개에게 그 탈취제 냄새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이다. 이때 개는 마치 우리가 식초나 아세트산을 바로 앞에서 맡는 정도의 폭력을 당하는 것이다. 폭력과 상처가 각인된 개는 다시는 그곳에 소변을 누지 않고 다른 곳에 누게 된다. 그러면 주인은 또 다시 탈취제를 뿌리고, 개는 또 다른 곳을 찾는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서 그렇게 주인은 개를 화장실로 몰고 간다. 그렇게 훈련이 끝난 개는 배설의 욕구가 들면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화장실로 들어간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면서 우리 개가 너무 착하고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개 입장에서도 과연 그럴까? 어쩌면 개는 화장실로 가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 폭력의 장소들을 지나치면서 도망치듯 화장실로 가고 있는 모습이 더욱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인간이 아이를 키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누고 싶을 때 누는 게 가장 편할지도 모른다. 아이의 장 건강에도 아마 그게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저귀를 채울 수 없기에 부모는 대소변을 스스로 가릴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반드시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누도록 가르친다. 그 과정에서 피곤한 엄마는 짜증을 부리고 혼을 내기도 할 것이고, 아이는 자신의 대소변을 치우며 인상을 쓰는 엄마의 표정을 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수치심과 상처는 아이에게 각인된다. 훌륭하게 혼자서 대소변을 가릴 수 있게 되는 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엄마의 환한 미소를 보며 아이는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교육받는다. 처음에 골목에서 소변을 지렸던 아이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이 아이는 이미 교육이 끝나서 수치심이 내면화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부모가 괜찮다며 길에다가 누라고 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교육이라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왜 폭력과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일까.


   그런데 참 궁금하다. 교육을 폭력의 각인, 상처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왜 인간은 그런 폭력과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까. 이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갖는 ‘미숙아’적 성격 때문이다.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에 독립될 때까지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 아프리카 초식동물들은 태어나서 바로 걷고 뛸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태반의 피냄새를 맡고 하이에나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독립적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립성 측면에서만 봤을 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최악의 동물이다. 인간은 완전한 독립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은 부모의 절대적인 보살핌이 요구된다. 그러한 보살핌과 사랑을 주는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 신적 존재, 절대적 존재가 된다. 아이가 울면 슈퍼맨처럼 나타나 아이의 문제를 뚝딱 해결해주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아이는 부모의 보호와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부모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노력한다. 부모가 자신을 원해야 내가 버림받지 않고 무사히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라깡,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여기서 타자는 본인에게 절대적인 존재, 즉 어린아이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 그 타자가 없으면 내 존재가 무너지고 사라질 만큼 중요한 사람인 경우, 우리는 그의 욕망을 욕망한다. 이는 성인이 된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 타자의 욕망대로 내 모습을 완전히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대적 타자의 욕망은 거부할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이 상처이고 폭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자가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우리는 김치를 모두 좋아하지만, 이유식만 먹던 아이에게 김치는 폭력 그 자체이다. 자랑스런 우리 한국의 마늘과 고추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성인인 외국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김치 먹기를 포기하는데 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부모는 아이가 김치를 먹기를 원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모가 한국인이라면 김치를 먹어야한다는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을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매일 소시지를 해 줄 수 없을 수 도 있고, 너무 피곤해서 김치찌개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싶은데 아이가 김치를 못 먹는다면 굉장히 불편하고 번거롭기 때문일 수 도 있다. 그렇게 부모는 아이에게 김치 먹기를 교육시킨다. 유년시절 내가 김치를 처음 먹었을 때 기뻐하는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또 김치를 먹지 못하는 동생을 어떻게든 먹게 하려고 물에 씻어서 주기도하고, 김치가 아니라고 속여서 먹이기도 하는 그런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눈물을 찔끔 머금고 김치를 입에 넣으며 기뻐할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것을 씹어 넘긴다. 우리는 그렇게 김치 먹기를 배웠고 그것에 성공하여 스스로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켜서 먹게 되었다. 


  공부와 관련해서도 절대적 타자인 부모의 영향은 강력하다. 꼬맹이가 받아쓰기 100점을 맞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과연 그 꼬맹이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인 것일까. 한국어의 명징한 통사구조에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글 맞춤법의 체계성에 감탄하며 앎의 기쁨을 느끼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때문에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받아쓰기 백점을 받아왔을 때 기뻐하며 자신을 안아줄 그 모습을 상상하며 아이는 열심히 맞춤법을 외운다. 그런데 이러한 부모의 훈육 방식은 또 다른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한다. 아이가 백점 맞았을 때 기뻐하며 안아주는 행위는 50점 맞았을 때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그 싸늘한 느낌까지 함께 전달하는 것이다. 민감한 아이는 50점을 받아왔을 때 느껴지는 엄마의 차갑고 서늘한 눈빛을 예감한다. 미숙한 아이에게 그것은 곧 존재론적 위기이므로 필사적으로 받아쓰기 공부를 하는 것이다.


  김치 먹기와 받아쓰기의 예는 모두 절대적 타자인 부모가 얼마나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폭력과 상처의 과정을 아이가 왜 감내할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미숙하고 약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만큼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타인의 욕망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이가 태어나 만나는 첫 타자는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빨리 성숙하고 철이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부장제는 농경사회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아선호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아들은 소중한 존재고 귀한존재라 소위 ‘오냐오냐’ 키우기 마련이다. 딸의 경우는 반대로 곧 다른 집으로 떠날 존재이므로 아들만큼 소중하지 않을뿐더러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는 하나라도 식구를 줄이려고 했으므로 딸은 밥만 축내는 존재로 여겨졌다. 우리가 정말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과거 농경사회에서 농사일을 대부분 남자가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정말 오해다. 대부분 여성이 농사일을 했고, 남자들은 대개 퍼질러져있었다. 이러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쪽은 당연히 남성보다는 여성이고, 이에 따라 여성은 더욱 부모의 욕망을 따르는 성실하고 착한 딸로 자라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가부장적 사회라고 할 때, 여전히 이러한 설명은 유효하다.


# 훈육의 결과


   교육은 상처와 폭력의 각인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미숙한 존재이고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게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상처와 폭력이 각인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푸코라면 ‘훈육’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가장 손쉬운 훈육의 방법은 앞서 말했던 행동주의의 방식, ‘상벌’이다. 훈육을 시키는 사람의 의도에 맞게 행동을 하면 상을 주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벌을 주는 것이다. 학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높은 성적을 받으면 상을 주고 낮은 성적을 받으면 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실제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고 직접적으로 벌을 주지는 않지만,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차가운 시선과 편견이 곧 벌인 셈이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은 훈육자가 세워놓은 상벌체계를 받아들여 훈육자의 의도대로 즉, 공부를 열심히 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이 말 그대로 학습이고 교육이다.


  훈육은 앞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타인의 욕망과 의도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훈육의 완성은 ‘내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과거의 권력들은 채찍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을 바탕으로 노예들을 부렸다면, 현대의 권력은 교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현대의 권력은 훈육을 통해 권력을 스스로 ‘내면화’하도록 하여 스스로 권력의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한다. 푸코는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을 통해 훈육의 과정을 설명한다. 원형감옥 안의 죄수들은 감시자들을 볼 수 없고 감시자들은 죄수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죄수로 하여금 언제나 감시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에 따라 죄수들은 감시자가 의심할만한 행동이나 금지된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러한 욕망이 들면 스스로를 감시자의 시선에서 검열하고 행동을 가다듬게 된다. 과거의 감옥은 간수들이 돌아다니면서 죄수들을 감시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몰래 다른 행동들을 할 수 있었지만, 현대의 권력으로 상징되는 파놉티콘 안에서 죄수들은 마음속에 CCTV를 갖게 되어 결국 언제 어디서나 권력자가 의도하는 대로만 행동하게 된다.


   문제는 그로 인한 결과이다. 파놉티콘의 죄수들은 훈육의 결과 누가 보지 않아도 자신의 침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한다. 심지어는 출소 후 집에서도 그것이 작동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원해서 침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타인의 욕망과 가치를 내면화하는데 완전히 성공하면 바로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숙아인 아이가 부모의 욕망에 따라 20년을 살게 되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 자신이 욕망하는 이것이 본인의 것인지 부모의 것인지, 아니면 사회에 의해 각인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부모처럼 의사가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부모에 의해 주입된 욕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눈물을 머금고 김치 먹는 것을 배웠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난 나머지 내가 원래부터 김치를 좋아했던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려서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 “너는 너희 아빠처럼 훌륭한 의사가 될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가 1지망에 의대를 적었을 때, 과연 그것을 적은 진짜 손은 아이의 것일까, 아니면 부모의 것일까.


# 교육에 대한 환상

   이처럼 결과적으로 교육은 상을 따르고, 벌을 피하게 하는 인간 즉, 기회주의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환상을 조금은 버릴 필요가 있다. 지금 학교의 교육이,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이 과연 자아를 실현하게 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과정인지는 정말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교육은 강제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부의 상벌체계, 경쟁 시스템을 통해 온몸에 생채기를 내가며 그것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한 사람들은 또 다시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에 반대하거나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상벌과 경쟁이라는 가치가 우리 안에 완벽하게 내면화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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