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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Oct 19. 2024

리디아 데이비스: 꾸준한 충동의 힘



최근에 <프랑스어 수업>과 <독일어 수업>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에세이 중간쯤 되는 이 애매모호한 범주의 글은 리디아 데이비스의 책 형식과 영향력 38페이지에서 따온 것이다. 읽는 내내 메모를 멈출 수 없었다. 쓰는 사람에게 '다음엔 뭘 쓰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무엇을 써볼까?'하는 설렘을 주는 아이디어들로 가득하다. 그는 자신이 소설을 쓰기 위해 소재부터 캐릭터의 성격과 행동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영감을 얻게 된 경로들을 샅샅이 공개한다. 글쓰기엔 왕도가 없다는 걸 느낀 사람의 초연함이 느껴진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원전을 구태여 피하지 않는다. 원전에서 시작한다. 익숙한 전설에서, 역사의 한 순간에서 자신만의 해석이 독보적인 관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소하고 엉뚱해 보이지만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흥미, 호기심, 충동,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되는 고유성을.


초단편, 단편, 장편, 에세이와 소설 사이, 시도 에세이도 아닌 어떤 것을 쓰는 동안 소재는 늘 일상에서 온다. 좀 더 은밀하게 말한다면, 일상을 낯설게 보는데서 온다. '그 소재는 왜 흥미로운가?''왜 그런 방식으로 쓰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이 글을 읽는 내내 마음속에 새겨진다. 자기 만의 범주를 만든다면 자신의 충동을 너무 다그쳐서는 안 되는 법이다. 맘껏 풀어놓을 노트를 준비하라는 그의 말은 설득력을 얻는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포스트 모더니즘 기반 글쓰기 방식은 내겐 꽤 익숙하고 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실험적인 글쓰기'라는 말로 단언하기엔, 그의 글쓰기에는 발견한 재료를 너무 바꾸려는, 독창적인 사람이 되려는 강박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쓴다. 재배치하고 매우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독자가 세계관을 만들도록 안내한다. 친절하고 쿨한 글방 스승을 만난 듯하다.


작업을 하거나 하려고 애쓸 때면 언제나 노트를 곁에 두는데, 그 노트는 머릿속에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이나 표현을 - 나는 그 하나하나를 모두 붙잡으려 애쓴다 - 저장해 두는 곳이 된다. 그 시절, 나는 일종의 불안 때문에 노트에 무언가를 많이 적었다. […] 노트에는 아이디어의 싹을 심어둘 수도 있었는데, 그 아이디어는 나중에 그게 어디서 온 건지 내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단편소설로 발전하게 될 수도 있었다. 《형식과 영향력》, 80


그가 '실험적'인 꼬리표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파격을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 그러니까, 기존의 덜 실험적인(?) 작품들의 관점과 범주에서 바라본 시선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정을 보면,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은 쓰는 과정에서 의도적인 실험이 아니라 포착의 충동을 따른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흥미와 관심사에 기반한 글을 쓴다. 그래야 고쳐 쓸 수 있고, 계속할 수 있다. 독자에게 외면당하거나 고립될 걱정 때문에 글쓰기를 망설인다면 노트에 맘껏 글의 씨앗을 뿌리거나 스팸메일에서 단편소설의 소재를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 이야기집을 읽을 생각이라면 말리진 않겠지만 부디 형식과 영향력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이야기집의 여백을 마꾸 채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랬으니까.


첫째로는 전통적인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변함없는 소망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적절한 소재가 있는지 나도 모르게 살펴보고 있었다. 둘째로, 나는 내가 특히 저녁 시간대에 경험했던 옥스퍼드의 물리적인 아름다움에 -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그곳의 건물들이 저녁 햇빛 속에서 드러내는 아름다움에 - 감동해 있었고, 그래서 그 장소를 묘사하고 싶었다. 셋째로, 나는 여러 해 동안《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 몹시 관심이 있던 터였는데, 그 일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형식과 영향력》, 111-112


리디아 데이비스에 따르면 글쓰기는 소망과 충동, 관심으로 시작해 고쳐쓰기로 끝난다. 그리고 고쳐쓰기는 독창적 글쓰기의 핵심이고 가장 재미있는 과정이다. 시작은 관습적, 논리적이었지만 고쳐쓰기 시작하면 좀 더 대담하고 예측불가하며 '부조리하'기 까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는 이야기들이 자신들을 써달라고 재촉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법을 쓰기는 했다.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으면 자리에 앉아 떠오를 때까지 계속 생각했고, 얼마나 불편하고 강요받는 기분이 들든 간에,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내게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을 썼다. […] 결국 나는 아이디어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게 됐다. 이야기가 자신을 쓰라고 내게 명령하거나 내 안에서 솟아나곤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내가 그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고,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낀다. 나보코프는 자신은 다만 한 편의 장편소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쓰기 시작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 노트 역시 내게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고, 나는 거기에 이야기를 정확히 적어 넣을수록 그 이야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153-155


우린 글을 쓰기 전에 얼어붙는다. 자기 검열이 시작된다. '이런 얘기를 누가 읽는다고 그래?' '시작은 해놓고 끝은 어떻게 맺을 거야?''너무 감정적으로 몰입한 거 아니야?''거짓말도 쉽지가 않군.''자료 조사가 덜 됐다고 느끼면 어쩌지? 재미도 없고 의미는 더 없다고 느낀다면?' 이제 막 쓰기 시작하면서 기준점을 나 자신이 아니라 기성 작가들의 문장들로 잡고 있는 건 아닐까? 내게서 빠져나가는 이야기는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그 나름대로 해야 할 의미가 있는 이야기라면 내 안에서 아우성 칠 것이다.


'어서 나를 써라! 당장!'


지역의 부고라든지 한 단어로 된 시하나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면(그렇게 볼 수 없는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쓰는 글의 독자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정 사람들의 취향을 맞추게 마련이고 누군가에겐 견딜 수 없이 좋지만, 누군가에겐 견딜 수 없는 글일 것이다.


글이 쓰는 사람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의 해석으로 완성된다는 점은 백번 동의지만 여전히 단상, '갑자기 멈추거나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실제로 미완성 상태로 남겨두'는 중단의 글은 여전히 '실험적'이라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쓰기 구력이기에 감당할 자유로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단상, 세 줄 일기, 엄마와의 통화 중 메모, 스팸 메일 광고 등이 글, 혹은 글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말에서 '글이란 뭘까?' 생각해 보는 지점은 있다. 글을 쓰기도 전부터 장르, 글의 길이, 독자의 수용 가능성 등 아니, 어쩌면 이게 글인가 이게 과연 글인가 대해 폭발적인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쓰는 사람의 손 끝은 자유로워진다.



읽는 내내 써본 글들을 떠올렸다:


중국어 작문 노트

중국 에세이/소설 피드백 메모

MZ의 시 분석 후 나만의 시 쓰고 합평

한 단락 소설/초초단편 소설



새로 해보고 싶은 작업도 생겼다:

간단한 경험 하나를 세 문장으로 나눠 쓰기

현실 꿈처럼 쓰기/꿈을 현실처럼 쓰기

미국에서는 '경찰 사건 기록'이라고 부르고 프랑스에서 faits divers, 문자 그대로 '다양한 사실들이나 일들'을 뜻하는 기록을 하는 작업*



리디아 데이비스는 쓰는 사람에게 쓰는 법보다는 촉발의 충동, 다 쏟아내려는 마음, 단어에의 애착을 안내한다.



얼마 전 노트에 적어둔 메모:

지옥이 별 건가? 아직 쓸모를 알아내지 못한 일상. 일상의 한 씬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소설은 소설가의 전유물이 아니고 일상의 소명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쓸모를 발견하는 일. 마음속에서 나를 써달라고 아우성치는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일. 그건 오직 직업 작가의 몫이 아니라 가장 멀리 있는 나를 살아내는 우리의 근거리의 고백이다.



멀리서 찾아낼 필요는 없다. 모르고 관심도 없는 대상을 억지로 찾아낼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내게 찾아오는 친숙한 일상에서 낯선 시선은 필요하다. 이를 테면, 문득 내게 날아온 스팸 메일 속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단어나 문장 구조 같은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글감이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맘에 들어야 한다. 내 글 속에 담고 싶을 만큼. 묘사하고 재현하고 싶은 감동이 있다면 더욱 좋지만, 그런 경험이 없었다 해도 오늘 하루의 경험을 세 줄 정도로 적는 일쯤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일상은 분명 글감이 된다. 무쓸모에서 쓸모를 발견하고, 예상가능함에서 예측불허를 만드는 일.


일단 쓰고 고친다. 이것은 다시 쓰기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다시 보고 다시 배치하는 일이다. 그나저나 얼마전 받은 메일. 여기서도 뭔가 흥미로운 점이 있을까? 몇 가지 적어둔다.





*리디아 데이비스가 프랑스의 문인이자 출판업자, 번역가 그리고 신문사 기자였던 펠릭스 페네온(1861 - 1944)의 글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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